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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ㅣ 역사 ⓔ 1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기획 / 북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자주 챙겨보지 못하는 다큐멘터리 프로였지만, 우연히 두 번 정도 시청했던 EBS 역사채널의 짧은 영상은 역사소설을 선호하는 나를 어렵지 않게 사로잡았다. 덕분에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일깨우며 역사의식을 고취시켰던 기억이 난다. ‘역사e’는 그 때 내가 인상적으로 시청했던 EBS 다큐시리즈인 ‘역사채널’의 내용들을 선별하고 간추려서 출간한 책이다. EBS 다큐시리즈 중에 하나인 ‘지식채널’의 시리즈 도서인 ‘지식e’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았기에 이어 출간된 ‘역사e’에 대한 기대감은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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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크게 3부로 나누어 구성했고 각 주제마다 7개의 역사적 펙트가 소개된다. 총 21개의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을 넘어서 그 뒤에 숨겨졌던 펙트를 들춰내기도 하고 이를 통해 역사적 진실과 평가를 재조명해보기도 한다.
각각의 역사적 펙트의 첫 시작을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정리하고 발췌한 글과 핵심 정보를 통해서 사건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간결하게 구성한 점도 돋보인다. 덕분에 뒤에 나오는 펙트의 상세한 설명과 일화를 통해서 역사적 진실을 이해한 후 첫 부분의 흐름으로 돌아가 전체를 되짚어보는 과정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 점이 각 이야기의 흐름을 수월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듯싶다.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사진과 그림은 각 이야기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21가지의 역사적 펙트 모두가 인상 깊었고 일부 몰랐던 이야기들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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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큰 획을 그으며 본질적인 힘이 되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나라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당 이회영 선생님에 대해서 아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당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으며 갑부였다. 경술국치가 있던 당시,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지만, 우당과 그의 형제들은 가진 것을 몽땅 내놓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망명의 삶을 선택한다. 그들이 판 소값을 오늘날로 환산하면 600억 원이었고 땅값은 2조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 망명길에 올라 향후 30여 년간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최근에 광해군이 영화화되면서 광해군의 삶을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보이기도 했다. 광해군을 단순히 폭군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의 삶을 제대로 알고 평가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임진왜란 당시 왕인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듯 피난을 가며 명나라로 망명하려던데 반해 광해군은 어린 나이에 2년이 넘게 피난을 다니며 민심을 다독였고 군량을 모아 지방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군에 대항했다. 그런 그의 전쟁 경험과 고통은 위기 극복의 본질을 깨우치게 했고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는 왕이 되어서도 국방문제와 더불어 전쟁 이후 황폐해진 국가를 다시 세우는데 주력했다. 또한 명과 후금의 전쟁 중 명나라의 파병요청에서 명나라보다 백성을 생각한 실리외교를 펼쳐 후금과의 전쟁 위기를 피해냈다. 하지만 명분론에 휩싸인 서인 세력에 의해 결국 탄핵이 되어 끌어내려졌고, 당시 국제정세를 읽고 냉철한 외교력을 행했던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와 서인세력은 후금을 무시하고 명나라만 바라보다가 후금의 침략을 당한다. 이것이 치욕의 역사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조총부대를 이끌던 공포의 인물 사야가, 왜군은 부산진을 함락한다. 신기술인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오는 왜군에게 창과 칼로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전세가 역전된다. 거기에는 왜군에게 공포의 존재가 된 조선군 장수 김충선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공포의 인물 사무라이 사야가가 바로 김충선이었다는 것이다. 김충선은 왜군들에게서 노획한 조총을 조선군에게 건넸고, 직접 훈련을 시켜 울산성에서 대승을 거둔다. 사실 명문 가문의 후계자였던 사야가는 아내와 딸을 볼모로 협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출병했다. 이후 그는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의 살육에 환멸을 느꼈고 본인의 목숨보다 부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늙은 부모를 업고 도망치는 조선인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고 귀화를 결심하게 된다. 김충선은 일본에게는 반역자였지만, 조선에게는 큰 은인이었다. 그렇지만, 김충선이 싸운 것은 조선도 왜도 아닌 문명의 가치를 파괴하는 침략자들이었다. 드라마틱한 김충선의 삶 역시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남았다.
많은 이들이 알면서도 침묵하던 위안부의 진실과 일본의 만행이 상세하게 알려진 것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통해서였다. 지금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비록 내가 경험한 일이 아닐지라도 치가 떨리고 가슴이 아프다. 매주 수요일 이 분들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신다. 어느 덧 1000번이 넘었지만, 그들은 이야기한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999 더하기 1은 1000이 아닙니다. 다시 1일 뿐.’
일본의 양심 있는 인사들은 수요시위에 참여해 사죄를 하기도 하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여전히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한국 정부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전향적 태도를 촉구하는 강도가 약하다는 것이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보니 반성하지 않고 역사에서 깨우치지 못하는 일본의 어리석음에 측은하기까지 하다.
생존자 평균 연령 86세, 2011년 14분이 별세하셨고 남은 생존자는 이제 65명이다. 이 할머니들의 인생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이며 이분들이 받고자하는 진심어리 사과는 과연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분들의 한은 곧 우리의 한이자 우리나라의 한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말의 길인 언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대간과 역사기록의 가치를 일깨우는 사관에 대한 이야기, 어린 아이들의 교육을 조부모가 맡는 선조들의 탁월한 양육방식인 격대교육, 오늘날 한류의 원조격인 문화사절단 통신사 이야기, 왕의 남자인 환관과 내시, 백정의 유래, 조선의 시간을 찾아낸 세종대왕, 역사적 사건을 담은 비망록, 동학농민혁명, 미국의 침략인 신미양요의 진실, 안중근의 삶, 폭파위기에서 벗어난 덕수궁 이야기 등 역사적 사건에서 소외되었던 세부적인 펙트들이 흥미롭고 진지하게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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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때로는 사람들에게 현재와는 거리가 먼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수한 시간이 흘러 세월이 변해도 역사의 중요성은 가벼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민족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뿌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고 발전해왔는지,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는 반성하고 깨달으며 삶에 대한 성찰과 지혜를 넘겨받게 된다.
과거의 수많은 왕과 위인들이 자신의 현재 시점에서 과거 역사를 통해서 문제를 파악하며 해결점을 찾아갔고, 현재를 반성하며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었듯이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배우게 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라는 미국 철학자의 말처럼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이들은 역사적 상황과 동일한 현 시대의 본질적인 흐름을 간과하게 되고 과거의 실패와 고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조상들의 애국심과 지혜, 수많은 혁신적인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반복된 침략과 수탈의 역사에 가슴 아프기도 했다. 또한 무책임한 왕과 위정자들의 권력욕, 사회계층의 차별 등을 과거의 역사에서 돌아보며 수백 년이 지난 오늘 날의 현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에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의 이야기를 접하다보니 그동안 알맹이는 모른 채 겉핥기식의 역사지식만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생각보다 몰랐던 역사적 펙트가 많아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는 왜곡되거나 어설픈 역사지식과 소홀했던 역사의식이 내심 부끄러웠다.
최근 기사에서 어린 학생들의 역사의식 수준을 보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린 학생뿐만 아니라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추지 못한 어른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어른들부터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추고 중요성을 인지할 때, 비로소 아이들도 따라갈 수 있으리라 본다. 역사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다양한 환경과 프로그램을 많이 접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책을 통해서 쉽고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일지라도 충분히 흥미롭게 독서하면서 진지하게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