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 나를 키워 준 시골 풀꽃나무 이야기
숲하루(김정화) 지음 / 스토리닷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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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

풀, 숲, 나무, 계곡 만이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대도시도 자연이다. 자연과 도시를 나누는 것은 인간의 편협한 생각일 뿐 우리는 모두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비치는 태양, 밟고 있는 대지가 바로 우리가 자연의 자손임을,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가르켜 준다. 넓게 확장하면 태양계 그리고 우주 또한 자연이다.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속에서도 풀과 풀, 그리고 나무와 놀던 나날들은 우리에게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고, 존재 이상의 가치를 가지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속에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어떤 이유로 다시 고향에 내려간 후, 그곳의 자연에서 이전의 자신을 추억하며 풀과 꽃, 나무에 대해 담담히 말하고 있다. 우리말을 써서 때로 읽는 게 막힐 때가 있지만, 그래도 글 속에 잘 녹아나며, 자연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지금을 잘 양념해서 배어나게 하고 있다. 자연 속에는 특히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진하게 배어 있다.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 곁에는 늘 풀과 꽃과 나무, 우리 먹거리들이 함께 있었으니, 우리가 자연을 생각하면 누구보다 어머니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때로 보이는 그림들이 정겹기도 하다. 저자는 아마도 시를 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글에서 시의 맛이 나고, 글도 많이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렸을 적부터 써온 일기가 큰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필력이 좋은 사람의 글을 읽는 건 기쁨이다. 요즘 그렇지 못한 저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늘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잔잔한 것들. 우리 일상 속에서, 특히 시골에서 자라났다면 더 자주 봤을 흔한 것들. 그런 것들 하나 하나에 추억이 있고 사연이 있다. 저자는 담담히 적으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고 있다.

아쉬움도 있다. 무엇보다 내용이 평이하다는 것. 그리고 때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데 그 경계가 불분명해 읽다가 멈춘다는 것. 그래도 자연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넘실넘실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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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영화로 읽는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안개’ 김승옥 작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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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고 막연한 희망과 환상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삼켜 버려 존재하지 않는 듯한, 소리도 묻히고 빛도 잠겨 모든 것을 막고 질식시켜 버리는 듯한, 안개는 때로는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한 소외로 우리를 모든 것에서 격리시켜 버린다.

그래도 항상 안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안개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시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안개를 대할 때 막연함과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조금은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안개와 눈. 이 둘은 비슷한 감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안개라는 영화는 김승옥이 65년도에 발표한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현대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소설이다. 읽다 보면 머리속으로 안개가 가득한 곳, 무진이 그려진다. 소설을 쓴 김승옥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화한 것이 바로 이 영화 안개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40년 정도 즈음에 이 영화를 얼핏 티비에서 본 기억이 있다. 다른 장면은 기억이 안 나는데, 영화의 첫 장면, 그러니까 주인공이 회사에서 업무를 보던 그 장면만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 그 장면이 기억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중요한 장면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무진기행을 다시 읽으면서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초반부, 버스 안의 풍경에서, 김승옥 자신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있는 점이다. 책에서 김승옥 사진을 본 후에, 영화에서 똑같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당시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 윤정희가 나온다. 윤정희는 지금 봐도 미인이다.

그런데, 각본집이라 하지만, 사실 영화와 비교하면 상당 부분이 다르다. 처음에는 다른 영화의 대본이 아닌가 해서 헷갈려 인터넷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김수용의 안개는 이 작품 하나 밖에 없으니, 이 영화의 각본이 맞다. 하지만 처음부터, 처음에 시작하는 롱테이크의 안개 장면이나 서울의 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모습 등은 각본 자체에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와 회상하는 부분들도 나오지만, 각본에는 그런 장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본집이라 해도, 영화와 너무 상이하니 이걸 각본집이라 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각본과 너무 다르다. 각본은 플롯이 단순한 감이 있는데, 아마 감독이 영화에 역동성을 주기 위해 새롭게 편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각본대로 만들었다면 영화는 더 단순해졌을 것이다. 아뭏튼 영화를 보지 않고, 이 각본만 읽는다면 여러가지로 오해할 소지가 충분히 있겠다.

과거의 모든 영화들이 이랬을까? 쪽 대본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그 자리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장면이 있었을까? 여러가지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대본집이다. 훌룡한 재산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겠지만, 영화와 너무 달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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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이야기 - 그 거룩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해 묻다 EBS CLASS ⓔ
정진홍 지음 / EBS BOOK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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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을 갈망한다.

신을 알고 싶어하고 느끼고 싶어하고, 가까이에서 함께 존재하며 내 삶을 좀 더 여유롭게, 편안하게, 즐겁게 해주길 바란다. 우리가 바라는 신은 결국 원하는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걸 누군가는 신이라 하고 누군가는 악마라 하고, 누군가는 허상이라 말한다.



인간은 주관적이고 인식에 한계가 있는 존재다. 절대, 객관, 진리, 초월, 신을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한계 내에서 이야기 된다. 결국 진리, 초월, 신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를 만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절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인지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한계이며 슬픔이지, 기쁨이고 환희일 수 있다.



저자가 바라보는 신은 유일신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신은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신,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신, 마음 속에 있기에 우리 몸이 만들어 낸 신, 인간을 벗어날 수 없는 신이다.



종교학을 다루는 학문에서 모든 신을 이렇게 다루는지, 아니면 저자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신은 인간과 유사한 신이다. 그래서 태어난 곳이 있고, 사는 곳이 있고, 어떤 사람의 모습을 하며 살아가는 신인 것이다.



여기까지 가면 이 책을 고른 이, 즉 대부분의 독자는 계시종교의 신도일 확률이 높은데 (인간과 닮은 신을 믿는 이들은 대부분 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삶 속에서 단지 신이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바라는 신의 모습과 어긋나 버리게 된다. 신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신 자체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무튼, 신을 바라보는, 신을 정의하는 관점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신에 대한 이야기는 맥이 빠진다. 종교학을 배우는 이들도 대부분 계시종교인들이 아닐까?



난 젊었을 때 열렬한 계시종교 신앙인이었지만, 지금은 자연종교로서의 신을 믿고 있다. 내가 믿는 신은 코스모스를 창조한, 우주와 그 우주의 너머를 창조한 자연과 같은 존재이다. 그 신안에서는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 흘러가며 생성과 소멸하며, 그렇게 그렇게 지나간다. 도덕경에서 바라보는 도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이런 믿음을 갖고 있는 나에게, 이 신 이야기는 저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관계로 나에게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신을 인간의 삶 속에 정착시켜,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죽어가는 신은 나에게는 신이 아니다.



이 책은 계시종교의 신이 아닌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신에 대해, 이미 우리 조상이나 선조들이 믿어왔던 그런 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익하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이런 신을 믿는 자들은 신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자기가 신을 부리며 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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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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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이라는 말처럼 오용될 수 있는 단어도 별로 없겠다.

왜 처음에 에피쿠로스의 주요 사상을 쾌락이라는 말로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쾌락 대신에 기쁨, 명징, 즐거움 등 좀 더 부드러운 말로 표현했다면, 에피쿠로스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범하는 쾌락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상당부분 풀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된 것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이지 변명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올바른 제목은 변명이 아닐 변론이다. 이 부분은 수정되야 맞다고 본다.

무튼,

이 책은 에피쿠로스의 여러 글들을 발췌해서 묶은 글이다.

에피쿠로스의 책 자체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서, 책 자체가 가볍기도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에피쿠로스가 갖고 있는 행복에 대해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윤리철학적인 부분, 그러니까 윤리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당시 견유학파, 그리고 스토아학파와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서로 간에 오해와 불신이 싹트고 있어서, 서로를 헐뜯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 후세로 오면서 다양한 구설수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소문들 속에서 진실은 무엇인지를 캐치해 내는 것이 근대 이후 연구자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에피쿠로스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저작만으로도 그에 대한 많은 소문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쾌락과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말하는 게 좋겠다.

에피쿠로스의 중요 윤리적 가르침은 이렇다.

. 축복받은 불멸의 존재는 분노나 호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분노나 호의는 약한 존재에게마 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니체의 사상과 비슷함을 느낀다. 니체는 분명 에피쿠로스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쾌락이 있는 곳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고통이 없다. - 즉, 쾌락은 있음이 아닌 없음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로 쾌락을 이해한다. 있는 것이 아닌 없는 것, 존재가 아닌 부존재가 결국은 진리로 가는 길이 되는 셈이다. 쾌락은 얻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이 부분은 깊이 성찰해 볼 맛이 있다. 없음의 소중함.

. 쾌락의 삶은 사려깊은 삶, 배려있는 삶, 아름답고 정의로운 삶이다. - 즉, 쾌락은 인간과 관계된다. 자기만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고 더불어 어울리며 그 속에서 쾌락을 발견하는 것이다. 배려, 사려, 정의는 개인주의에서는 나올 수 없는 단어이다. 조용한 곳에서 사는 게 좋지만 그래서 사람들간의 관계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다.

. 육체적인 결핍에서 벗어나 고통이 제거된 상태가 아포니아, 정신적인 두려움이 제거된 상태가 아타락시아(평정심)이다. 육체의 쾌락은 육체적 고통의 부재, 마음의 쾌락은 평정한 상태, 고용한 상태가 된다. 도덕경의 도에 근거한 마음가짐과 비슷하다.

. 일생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 또는 우정을 얻어야 한다.

에피쿠로스 생전에는 스토아 학파의 여러 철학자들과 마찰을 많이 빚었던 것 같다. 각자 자신의 학파의 우수성을 내세우기 위해 반대편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스토아 철학자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200여 년 뒤의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일련의 서신에서 시종일관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들려주고 있다. 학파를 떠나 여러 철학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생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고대의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면 깨닫는 게 있다. 바로 고대나 지금이나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 결국 고대에 이미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고, 그것들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적으로는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성찰적인 측면에서는 비슷한 수준을 이어 오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축복일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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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중력 - 생의 1/4 승강장에 도착한 어린 어른을 위한 심리학
사티아 도일 바이오크 지음, 임슬애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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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청소년기 다음에 이어지는 약 20년 간의 기간에 대하여 쿼터라이프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이 쿼터라이퍼들에 대한 글로 보면 될 것이다.

쉽게 말하면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이어지는 청춘의 시기, 인생에 대한 다양한 도전과 절망, 실망과 사랑, 도전과 실패가 병존하는 시기, 한 인간으로 오롯이 서기 위해 조금씩 단련해 가야 하는 시기, 우리 인생을 정의할 수 있는 시초가 되고, 그 발단이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시기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고유한 지침과 충실한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심리치료사인 저자 또한 그런 시기를 겪었고, 그 시기 동안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구축해 왔다. 새롭고 혼란스러운 체험, 그 가운데 실패, 관계, 위험, 갈망 등을 직접 경험하며 심리적 성숙을 이루어 간다. 그러면서 저자는 네 개의 기둥을 말한다. 분리, 경청, 구축, 통합. 이 네가지는 시간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다. 전부 삶의 안녕과 만족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중요한 심리적 작업 분야이다. 결국은 심리치료사이기에 심리치료의 일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저자는 자기가 경험한 20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20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십대와 다르지 않다. 힘들게 취직하지만, 그 일을 통해 만족하지 못한다.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부여할 수 없고, 잘 지내고 있다고 우기지만 사실 들여다 보면 잘지내고 있지도 못하다. 배우면서 지출한 수많은 빚들과 암울한 미래 속에서 우리 20대들은 축복받은 사회 진출이 아니라, 그 문지방에서부터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며, 당황해 한다. 어떻게 보면 냉혹한 현실의 진정한 모습일 수 있다. 우리도 동물일 뿐인 것, 우리도 생존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실존의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첫 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이건 20대만 겪는 것이 아닌, 우리 모든 선조들과 아버지들, 삼촌들, 그리고 오빠와 누나들이 이미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어떻게 성숙하게 내 안에서 키워나가야 하는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사회는 냉혹하다. 이건 사실이다.

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쿼터라이퍼는 무엇보다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만의 개인적이고 진실한 삶. 온전한 자신을,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쿼터라이퍼에게 중요한 목표라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30대에 내면과 외면이 일치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을수도 있지만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내면외 외면,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은 수많은 시간과 성찰, 반성과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 그리고 40대 이상이 되며 삶을 돌아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30대는 앞을 보는 시기지 뒤를 보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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