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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평점 :
이전에도 썼지만 이어령 교수는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석학이다.
나에게는 지성의 정점에 머물러 있고, 시인이다
지금부터 읽으면서 느꼈던 점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고 한다.
이전에 냈던 80년.. 이라는 책은 이어령 교수와 저자 간의 간격이 너무 커서 읽기 불편했었지만
이번 책은 그런 간격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김지수 작가가 어려운 일을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김지수 작가가 시를 쓰는지는 모르지만, 시적 감성이 있어서 둘 사이의 inter가 좁아져 좋은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직시하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이어령 교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솔직한 대화는 힘이 있다. 그 힘이 느껴져서 좋았고, 이어령 교수가 갖고 있는 지성의 향기가 많이 묻어 있어서 좋았고, 죽음 앞에서도 느껴지는 끊임없는 노력이 보여서 좋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솔직하고 외로운 모습 속에서, 우리 주변에서 보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여 좋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책들 중에 인간 이어령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어령 교수는 책 곳곳에서 영성을 이야기하고, 기독교에 대해 언급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멈춘 느낌이 난다.
지성과 영성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심연은 노력만으로는 건널 수 없다
이어령 교수도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려 하지만, 그 답을 못찾고 헤매고 있다. 아마도 당신 스스로가 영적 체험을 통해 영성으로 간 것이 아니라, 딸의 간고간 부탁으로 영성으로 가려 했기에, 거기에서 나오는 헤맴 같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이고, 하나는 스스로 깊은 심연 속에 뛰어드는 것이다.
첫 번째는 책에서도 나오지만, 테레사 수녀 조차 하나님의 콜링을 받지 못했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콜링을 받았음에도 받은 것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의견일 뿐이고, 본인이 소명을 받지 못했다고 믿으면 소명은 받지 못한 것이다. 소명은 타인이 바라보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판단되야 한다. 파스칼처럼 영적 체험을 경험하는 자는 극히 소수일 뿐이고, 이는 내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깊은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성프란체스코가 보여준 자기 부정이 온전한 자기부정이었다. 이는 빌게이츠에게 모든 명예와 재산을 다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하라는 말과 같다. 이 또한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어령 교수가 지성과 영성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머물러 있다느 느낌을 많이 받는다. 지성만으로는 영성으로 넘어갈 수 없음을 알고, spirit을 말하지만, 아직도 지성이 그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내려놓아야 영성으로 갈 수 있는데, 내려놓으려는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지성에 대한 미련이 보인다
이어령 교수는 지성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계시 종교의 영성이 아닌 스피노자의 영성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 내 삶의 방향이 바뀌거나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은 나의 성찰과 반성으로 내 안에 능동적으로 들어와야 하지, 누군가의 부탁이나 간청으로, 비록 그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내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내 안에 수동적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만큼은 가족이라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 줘야 한다. 서로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배려해주면서 각자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령 교수의 마음 속에 사랑하는 딸의 간청으로 기독교의 신을 인정하지만, 아직도 내부 안에서는 끊임없는 지성과 영성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시간도 별로 없는데,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셈이다. 이어령 교수가 모든 것을 버리던지, 아니면 영성을 버리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밖을 지향하던 모든 것들을 다시 안으로 불러들여, 안에서 갈고 닦아 하나의 진주를 만드는 과정이다. 깊은 내적 성찰과 반성을 통해 하나의 진주를 만들고, 그 진주를 마음에 품은 채, 신이 우리에게 베푼 선물에 감사하며, 영원한 소멸을 체험하며 우리는 소멸해 간다. 이게 죽음이다.
그런데 아직 그 진주가 다 만들어지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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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감을 주는 한 문장이 있어서 말하고 싶다.
책 중에 보면 이어령 교수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이 나온다. 저자가 그 이유가 뭔지를 묻지, 이어령 교수는 "나는 열렬히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네." 라고 말했다.
나는 요즘 계속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공부방을 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고,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한 인격체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서, 3년 동안 철학, 역사, 종교와 논어, 장자, 도덕경 등 동양 경전, 문학, 영어 등 4개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주 3회 정도 3~4시간 교육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지, 그리고 몇 년 전 발병했던 암이 더 악화되지는 않을지 고민하면서, 실행 여부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장이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느 것,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는 내가 공부방을 내려는 취지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외로움이 결론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해 지금의 이어령교수를 만들었지만, 지적 대화를 나누며 행복하게 성장했을 한 인간인, 이어령의 삶이 개인에게는 더 가치있는 삶이 됐을 것이다.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이 문장이 결론을 내는 데 많은 영향을 줄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