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전두환이 제 원죄에 대해 전면 부정함으로써 그가 영원히 ‘공’에 해당하는 사항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너무나 큰 죄를 저질러놓고 그에 대해 일말의 사죄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정체성은 오직 하나, ‘살인자’로 귀결되어 버렸다. 그가 세상을 향해 "내가 잘한 점도 있었잖아!’"라고 외칠 때마다, 세상은 그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를 인식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더 커다란 죄를 낳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죄의 부피에 압도되어, 전두환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갖고 있었을 ‘부분적인 미덕’이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

전두환이 자신에게, 후손들에게, 국가 공동체 전체에게 끼친 세 가지 불행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단연코 마지막 요소, 국가 공동체 전체에게 끼친 영향이다. 뉘우치지 않고 간 거악(巨惡)의 존재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황을 있었던 그대로 들여다보고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각각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 과거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나갈 토대로 삼을 수 있게끔 방향을 설정하는 법,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파악하고 현실에 적합한 선에서 이상을 지혜롭게 실현하는 법,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설정해 희생양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법과 같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보유해야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전두환 시절에 경기가 좋았던 것은 1985년의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나타난 3저(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호황이라는 외부 요인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라고 외쳐보았자 이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특권을 타고난 이들은 어쩌면 그 특권으로 인해 행복에 대한 일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전두환은 우리가 지나온 한 세기를 보여주는 인물, 시층이 겹겹이 쌓인 한반도의 20세기를 보여주는 절단면 같은 인물이다. 홉스적 자연 상태에 놓여 아비규환의 지옥을 살아내던 개개인이 다시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돌연변이이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구성원 전체가 그 생물체의 파편을 지니고 가게 된 우리 사회의 대자아이기도 하다.
전두환을 읽어내는 일은 한국을 읽어내는 일이고, 자신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국민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전두환의 육신은 갔지만 우리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다. 그의 육신이 떠난 지금, 그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가 한국사의 정확한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존재했던 한 인물의 행적을 우리 사회 발전의 불쏘시개로 삼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시간이다.

스물일곱의 청년 전우원이 나타난 것은 이런 고민에 빠져 있던 때였다. 선악에 대한 선명한 답을 도출해 내지 못해 씁쓸해하던 내 눈앞에, 전두환의 심장을 나누어 가진 청년이 나타났다. 선명한 발음으로 조부를 학살자라 칭하고, 광주로 날아가 유족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나는 넋을 잃었다. 이것이 역사로구나! 겁 많고, 힘을 맹신하며,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던 장대한 무인 스토리의 끝이 그 무인의 손자가 출현하는 장면으로 끝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무인의 혈육이 그토록 순도 높은 사과를 내놓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전두환의 손자가 만들어낸 이 대단원은 빛과 어둠 간 승부에 대한 강력한 답이다. 권선징악은 단번에 깃들지 않는다는 것. 근대가 그렇게 왔듯 권선징악 또한 굽이굽이 돌아온다는 것. 대로를 통해 단번에 달려오지 않지만, 또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오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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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뒤인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로 가기 전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태는 우리 민족사에 불행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뒤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전두환이 했던 발언 중 가장 ‘참회’에 가깝게 다가간 발언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못을 규명하거나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은 그 발언을 온전한 ‘참회’나 ‘사과’로 볼 수는 없다.

그저 ‘현재의 나’가 무사히 살아남아 안녕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를 피상적으로, 철저히 자기 위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응한 것은 그런 그의 근본적인 기질, 즉 ‘현재, 여기, 나’만 보고 사고하는 특성,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에게 완벽하게 둔감할 수 있는 그의 탁월한 능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고려 대상이 단일한 한 사람, 오로지 ‘나’밖에 없는 전두환에게는 다른 요인에 대한 고민으로 속을 끓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용감하게 덤벼들어 사건을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전두환을 ‘나이브’하다고 평한 허화평의 안목은 정확했다. 오직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들의 눈에 순수, 의리, 용맹, 카리스마 같은 가치의 상징으로, 동시에 단순, 무식, 잔인, 독선, 나이브함과 같은 무지성의 아이콘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고(혹은 중시한다고 대외적으로 무척 강조하고),

전두환은 당황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정규군이 국민을 살상했다는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덮을 수 없는 대형 악재였다. 전두환은 알았을까. 자신의 무신경과 특유의 낙천성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을 추동했다는 것을.

공존하기 어려운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내보이는 이런 인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키워드는 ‘가벼움’이다. 그의 90년 인생을 뒤쫓다 보면, 전두환의 내면에 어떤 막이 존재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면의 일정 깊이 이하로 내려갈 수 없도록 만드는 단단한 막이 존재해, 그 내면의 소유자가 언제나 의식의 표면과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게 했으리라는 상상을. 이 막의 기능으로, 특정 사건과 마주쳤을 때 전두환은 그 사건을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 있었다. 핵심을 파고들어가 진상과 대면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현상에 표면에 머물다가 내상을 입기 전에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의 인생 전반기의 세속적 영광, 정통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냈던 대통령 재임 기간의 모순적인 상황, 사과하지 않은 채 끝없이 국민에게 지탄받았던 33년간의 길고 기나긴 몰락은 모두 그의 일정한 기질에서 연유했다고. 전두환의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특별한 가벼움이라고.

5공화국을 살았던 국민이 만끽했던 것은 어떠한 자유였는가? 배고픔에 포박된 상태로부터의 자유였다. 두둑해진 지갑을 들고 밤새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길 자유였다. 색채로 가득 찬 자극적인 스크린과 브라운관 화면을 보고, 외국에 나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낯선 공간의 공기와 음식을 맛볼 자유였다. 한 마디로, ‘몸’ 혹은 ‘감각’과 관련된 자유였다.

이런 이미지는 먹고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이들에게 더욱 여과 없이 전달된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를 파헤쳐 볼 만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나라’가 정해놓은 규칙과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른다는 엄포가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라’로 보이는 이미지들에 순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국가 운영을 잘 해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력 있는 인재를 기용해 공동체가 잘 돌아가게 만들면 그 인재가 세운 공이 그대로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발탁한 인재가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 얼굴과 다리가 되어 자신을 보호할 것이고, 훗날 단죄의 시간이 오면 자신의 일부가 된 이들이 세운 공로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면 될 것이었다.

그는 정통성이 없는 대통령이었기에 역설적으로, 경제와 같은 핵심 분야에 반드시 ‘실력 있는’ 인재를 써야 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각 분야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을 찾아내 자리에 앉힌 뒤 권한을 몽땅 위임하는 ‘통 큰’ 리더였다. 분야의 일인자를 찾아내 장관으로 임명한 뒤엔 차관 이하 그 부서 인재에 대한 인사권을 전부 그 장관에게 주었다. 하지만 정권 보위를 위한 자리, 이를테면 안기부장이나 내무부 장관(경찰 지휘권을 가진), 국방부 장관 같은 자리에는 철저히 철저히 측근들을 기용했다.

자신이 진정 떳떳하다고 생각했다면 길게 늘어지는 변명을 세 권이나 되는 책으로 만들어 출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쓴 회고록을 읽는 것은 뜻밖의 위로를 준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던 독재자, 제게 잘못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듯 보였던 독재자였지만 내면은 편치 않았구나. 오죽했으면 저렇게 시뻘겋게 속을 드러내 보이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이런 몇 가지 예시만 보아도, 정통성 없는 독재자의 존재가 한 국가의 국익에 얼마나 큰 손해를 초래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정통성 없는 지도자는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안보와 교역, 민생과 치안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이렇듯 조금 떨어져서 인생 전체를 놓고 조망해 보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무인 대통령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고 좇았던 군인, 가시적인 것 이면에 도사린 함의를 볼 지성이 없었던 쿠데타 주역 전두환이 만일 1979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는 그때도 12·12를 일으킬까? 정상에 오르기 위해 저질렀던 일이 평생에 걸쳐 치러야 할 불안과 사천만 국민들로부터의 증오라는 죄과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도 국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를까?

그와 그의 가족이 느꼈을 불안과 억하심정을 생각해 보면 전두환이 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감옥 밖에서 여생을 보낸 것이, 남은 생 내내 감옥에 머물며 모든 걸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뒤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보다 더 정교하고 강력한 단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의 주요 임무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내재한 다양한 욕망을 조율해 내는 일이다.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시선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고, 심지어 한 사람의 내부에도 상충하는 정반대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정치인은 누군가가 표방하는 말이 실제 그 사람이 욕망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언제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이 상대하는 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기민함도 장착해야 한다. 상대의 내면에 도사린 진짜 욕망을 알아야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거나, 부분적으로 충족시켜 주거나 아예 억누르도록 유도할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정치인 자신에게 내재된 다양한 욕망을 읽어내고 대면하는 능력이다. 제 안의 욕망을 읽어낼 줄 알아야 타인의 욕망도 읽어낼 수 있는 법이므로. 그런데 수많은 타인과 만나 그들의 욕망을 읽어내야 하는 정치인이 그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의 발생 원인을 정치인 자신에게서만 찾거나,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들에서만 찾는다면, 그 정치인이 이끄는 공동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정치인은 국가적·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문제라 명명하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엉뚱하게 문제를 설정할 경우 문제가 아닌 것이 문제로 명명되거나, 진정 문제로 삼아야 할 일을 전혀 문제로 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전두환은 자신과 다른 역사를 가진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식의 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전두환이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범위가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우로 한정된다는 것.

이 문제는 상상력의 차원에서 답을 찾으면 한결 이해하기 수월해진다. 전두환은 상상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 그래서 내가 잘해주면 결국 그 결과가 내게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진정한’ 타인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낯선 생명체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인지하고 그의 희로애락을 떠올려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나의 유한함을 직시한 사람만이 타인의 유한함을 알아보고 연민할 수 있는데, 자신의 결함과 마주 서서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없는 사람은 관성적으로, 그저 내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누군가 접근해 오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나서서 호감을 표하고 손을 내미는 편이었다. 백담사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분노하고 서운해했으면서도 노태우에게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했고, 재임 당시 그토록 제거하려고 노력했던 ‘용공 분자’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자신을 ‘전임 대통령’ 자격으로 초대했을 때 반색하며 청와대로 달려갔다.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김영삼의 부고를 들었을 때도 장례식장에 가서 조의를 표했다.
이후 전두환은 틈날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가 가장 좋았다’고 회고하며 전임 대통령으로서 초대받고 대접받은 것에 대한 기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회고록에서 박철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권위를 세우려 들고 독선적인 기분에 빠지는 듯하다. 때문에 충격적 대응이나 과격한 조치를 지시하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이런 때 핵심 참모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당장 확정 집행될 일이 아닌 경우에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치밀하게 준비하는 자세를 보이고, 대통령도 차츰 장·단점, 문제점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몇 차례 요약·정리·보고하여 결국 대통령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향성이 강한 인물은 사람을 모으고, 설득하고,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외향형 친구와 가까이하며 그 친구가 쟁취해 낸 기회와 그에 따른 인맥을 공유하고 싶어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 친구의 생각 없음과 사려 깊지 못함을 비판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직 법리로만 따져 자신을 변호하는 220페이지의 서술에서, 전두환이 그때껏 해왔고 재판이 끝난 뒤에도 반복적으로 내보이게 될 그의 내면의 핵심 특성 중 하나가 엑기스 형태로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우기’이다.

대한민국을 겉과 속이 다른 공동체로 파악한 건 김대중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은 서구에서 몇백 년 동안 숙성된 제도를 갑작스럽게 이식해 와야 했던 아시아 변방의 분단국, 분단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전쟁을 겪은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이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사상(왕조 시대의 수직적 신분제와 만민평등사상에 바탕한 민주주의라는)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1980년 5월, 재야 지도자들이 "모든 군인들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들은 해머를 놓고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공원으로 모여라."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려 했을 때 김대중은 펄쩍 뛰며 말렸다. 그렇게 과격한 성명을 내면 혼란을 원하지 않는 대다수 국민이 돌아설 테고, 이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신군부에게 무력을 동원할 빌미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이유였다. 결국 재야인사들은 기존의 과격한 주장을 접고 "계엄령 즉시 해제", "전두환·신현확 퇴진"으로 수정해 성명서를 냈고,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은 채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변화 속도에 대한 믿음의 차이’라는 말이 있다. 보수는 사회의 변화가 ‘제도 신설’에 의해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으니 기존의 사회적 관례를 급하게 바꾸기보다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살펴가며 차근차근 바꾸자고 주장하고, 진보는 그렇게 늑장을 부리다가는 기득권 세력의 현상 유지 기도 때문에 영원히 바뀌지 않을 테니 제도를 바꾸어 단번에 확연하고 큰 변화를 이루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보수는 인간의 내면이 선이나 악, 둘 중 한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니 복잡한 인간 심성을 고려해 제도적 강제를 실현하는 데 신중을 기하자고 하는 반면, 진보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정해서 이끌지 않으면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의 내면에 있는 악이 승리해 사회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고 전망한다.

다른 반대 진영 정치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과격한 주장을 펼쳐 대중들의 신망을 잃는 일이 빈번했는데, 김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김대중은 올바른 말을 하는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 그 말이 현실에서 어떤 파급력을 지닐지 면밀히 짚어보고 치밀하게 준비한 뒤에 말을 내놓았다.

강인한 외피를 두른 악인의 내부에 웅크린 작고 쭈글쭈글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량을 갖게 된 자는 더 이상 상대를 미워할 수 없게 되는 법이므로.

전두환을 향한 단죄와 용서가 이처럼 최고 결정권자의 사적 동기로 가해졌다는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가 아직도 특권층의 사회이며, 결정권을 쥔 소수 인물의 사적 동기에 따라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는 단계를 넘어갔음에도 그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에게 가해진 마지막 단죄의 철퇴는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왔다. 회고록에 5·18 당시 헬기 사격 목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써서 허위사실유포죄로 고발당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은 87세였다.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행적을 세세히 기록해 남기길 원했다. 진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듣기 좋게 윤색된 버전으로. 후대에 남기는 회고록에까지 거짓말을 남발했다는 것은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까지 진실을 침소봉대(
針小棒大)할 수 있다 여겼음을 보여준다. 퇴임 후 30여 년이 흘렀건만, 크고 작은 수많은 매질을 당했건만, 전두환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조악한 거짓말로 역사의 심판을 비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 부인’은 그러한 여성의 자리를 모두 모아 집대성하고 상징성을 얹어 부풀려 놓은 자리다. 공적인 책임이 없지만 실질적인 책임이 막대하고, 일에 대한 결정권이 없지만 일이 잘못될 경우 우회로를 통해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책임과 인과관계가 모두 비공식적인 경로를 따르기 때문에, 비판과 단죄도 비공식적이고 감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통로를 통해 온다. 바꿔 말하면, 대통령 부인이라는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은 개인의 대처 방식에 따라 성격이 판이하게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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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이거 노리고 북플 독보적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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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07 1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 은오 님은 영영 못 타는 적립금이네요! ㅋㅋㅋㅋㅋㅋ

책식동물 2023-07-07 13:14   좋아요 2 | URL
으학학학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제가 이게 될 줄 몰랐습니다... 50명 뽑는 건데 제가 어떻게 되었냐며 !!! !!!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직장이 있음을 감사 또 감사히 여깁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적립금 탈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0.<

은오 2023-07-08 03:42   좋아요 2 | URL
엥 아니 여기서 갑자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라니님 제 새로운 친군데 체면좀 지켜줘요!! ㅋㅋㅋㅋ 하.... 고라니님 이분은 저랑 결혼하실분이라 제가 참습니다

책식동물 2023-07-09 23:49   좋아요 0 | URL
북플 입성 보름만에 친구와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다... 미리 축하인사 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7-09 23:53   좋아요 0 | URL
네?! 뭐라고요?!



축의금은 알라딘 적립금으로 은오 님께 보내주세요……

책식동물 2023-07-10 00:0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잠자냥님 측과 은오님 측에 동시에 보내드리면 안 되나요ㅠㅠ 두분다놓칠수업서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7-10 00:24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측에 보내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좀 금전감각이 없어서 저희 결혼하면 돈관리는 잠자냥님에게 일임해야겠다고 상상 중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식동물 2023-07-10 00:38   좋아요 0 | URL
서로 축의금을 상대에게 보내달라 하시는 모습 정겹고 아름답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7-08 0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독보적 걸음수를 1000으로 낮춰줬으면 좋겠어요.... 히키코모리 차별함 ㅠ

잠자냥 2023-07-08 10:46   좋아요 1 | URL
그거도 채우지 못할 거 같은데…. 눕서대 펼치고 눕기만 하는 자여….

은오 2023-07-08 11:21   좋아요 0 | URL
그....천보 정도는 집에서 폰들고 제자리걸음하면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책식동물 2023-07-09 23:48   좋아요 1 | URL
출퇴근하는 날에는 괜찮은데 쉬는 날 잠깐 동네 나갔다가 5천보 걷기(저는 평일에 휴일이 있스빈다)를 하게 되면..............진짜 채우기 너무 힘들어요 ㅠㅠ 그런데 은오님 눕서대로 독서하시나요!!??

은오 2023-07-10 00:33   좋아요 0 | URL
네 제 침대 옆엔 눕서대가!! ㅋㅋㅋㅋㅋㅋㅋ 페이퍼에 올린 적 있어요!
https://blog.aladin.co.kr/euno/14233969
보통은 내내 침대에서 읽진 않고 의자에서 읽다가 피곤하면 눕습니다~! 😆

책식동물 2023-07-10 00:38   좋아요 0 | URL
헐. 사진 보고 왔는데 이거 진짜 대박적이네요... 저 휴일에 집에서 책 읽으면 이부자리에서 걍 드러누워서 읽는 사람인데 이거 하나 장만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ㅋㅋㅋ 전자책 유저들도 누워서 블루투스 리모콘으로 띡띡 누르며 책 읽는 걸 눕독이라고 하던데, 은오님도 눕독을 실천하시네요. 정말 짱이다.
 

솔직히 저는

철학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책을 삼.

왜냐!!!

전기가오리에서 7~8월에 현상학 입문 공부모임을 진행한대요.


ㅋㅋ...

그래도 관심 없음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세용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평생 현상학이라는 거 찍먹을 못할거라구용

찍먹도 기회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고

머리에 남는 거 없고 여전히 관심 없다 싶어도

이렇게 공부모임하고 찍먹해서 머리에 좀 남은 게

나중에 책을 읽을 때 도움이 좀 되니깐...

그 사소한 도움을 위해 저는 이번 달에 현상학 책을 펼칩니다.





성의 변증법.

죄송하지만 변증법이 뭘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깊.생.(깊이생각하기)을 잘 안 하는 사람이라서

변증법이고 철학이고 그냥 먼나라 얘기 같아요


그런데 아주 기맥힌 책이라 그래서

또 7월에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이... 꽤 있으신 듯해서??

저도 시류에 편승하고자 샀습니다.


학생 때부터 페미였던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뜨게 되어,,, (진짜 한남이 안 좋아하는 거 다 하는듯)

페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게 됐는데

(그나마 있는 관심도 그냥 여자보다는 노동자 여자, 퀴어, 유색인종 여자 이쪽에 관심이 더...)

반성하며...

읽겠습니다. 꼼꼼히.






아 이렇게 두꺼울 줄 몰랐다고

(전기가오리 공부모임 개설됨)


소설 좋아하는데 소설...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거 진짜 이번 책구매에서 진짜 대박기대했다

이게 진짜 ㄹㅇ 기대된다 ㄹㅇ 진짜.... 하... ㄹㅇ


두 편의 꼼꼼한 리뷰를 읽은 뒤 제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용.

우선 도끼 같은 책이라는 점에서... 점수가 있고

또 주파일zoophile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어서

새로운데 흥미롭다? 이건 꼭 찍먹해야한다


그래서 찍먹하게 되었습니다


주파일이 독특한 것도 있지만

반려멍멍이가 있는 입장에서

반려멍멍이를

나와 대등한 존재자로 대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인간saekki들아 섹슈얼리티에 그만 애착...집착...착을 갖도록 해라 고마해라

이런 생각도 들어서

저도 함 읽어보고...

인간에게 섹슈얼리티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하..........................

이거 전자책 출간 계획이 없대.........................................................................

(빈곤한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입니다. 확실히 그냥 여자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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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06 0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멍멍아.... 동물성애자 책에서 떨어져 있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온 책인가요?! <성의 변증법>은 저도 너무 좋게 읽었고요! <비평이론의 모든것>은 예전부터 제 보관함에 있었지만 어려울 것 같아서 주문은 안하고 있는 책. ㅋㅋㅋㅋㅋ 남이 산 책 사진 보는 건 항상 좋습니다!! 😆

책식동물 2023-07-06 15:36   좋아요 1 | URL
???헐??? 진짜 강아지가 동물성애자 책이랑 붙어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자기도 동물이 주제인 책이 좀 궁금했나봐요;;ㅋㅋㅋ 비평이론은 전기가오리에서 공부모임 진행한다고 해서 샀습니다!! 그런데 생각외로 너무, 너무, 너무 두꺼워서 깜짝 놀랐어요 (X0X) 성의 변증법은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마침 이번에 또 읽는 분들이 계신다고 하여 살포시 샀습니다. 하지만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ㅠㅠ 어려운 책을 진득히 읽을 만한 시간이 없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다닐 때 공부 조금만 하고 책읽을걸!!! 후회했지만(사실 공부 글케 많이 한 것도 아님) 확실히 시간이 주는 짬은 무시 못 해서... 더 열심히 시간 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은오 2023-07-06 22:15   좋아요 1 | URL
주인은 왜 이딴 책을 샀나.... 하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월루하면서 최대한 에너지 아끼시고...... ㅋㅋㅋㅋㅋㅋ 바쁘신 와중에 독서생활 응원합니다!! 여기서 책 얘기도 많이 해요 >_<

책식동물 2023-07-07 13:11   좋아요 0 | URL
좋아요!! 책얘기 자주 올리겠습니다>< 여기 훌륭하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저는 명함도 못내밀지마는ㅠㅠ 낄 수 있도록 정진 또 정진하겠습니다!!!
 

전두환이 품은 자아상 속에는 살인자라는 이미지가 섞여 있었을까? 섞여 있었다면 함량이 얼마큼이었을까. 아니면 정녕, 진심으로, 온전히, 그의 자아상은 구국(救國)의 영웅이었을까? 그게…. 가능한가? 어쨌든 그도 인간인데? 그에 대한 답을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영원히.

잘못을 저지른 이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일 경우, 제 잘못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의 인격과 삶이 이미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기에, 무엇이 자신의 과오이고, 무엇이 시대·문화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따지는 작업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역사적인 인물의 행보를 추적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 인물의 성격적 특성을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특정 인물의 행동을 가능케 한 역사·문화적 상황을 살피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33년이라는 기간 동안 왜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는지, 왜 우리 사회는 그를 단죄하지 못했는지를, 전두환이라는 특별한 개인의 내재적 관점과 그가 속해 있던 시대적 상황이라는 외재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제대로 규정되지 않은 ‘악’은 물리적 생명력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남아 현재를 만들어내고, 미래에도 줄기차게 영향력을 이어간다. 그 영향력을 끊어내는 첫 단계는, 우리의 기억 저편의 시공간으로 넘어가 버린 ‘단죄받지 않은 악인’의 면모를 구석구석 살펴서,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박혀 단단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파편들을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행운의 덕을 보았다 할지라도, 그 운의 수혜자가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결과를 맞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두환이 숱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속세적인 의미의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천수를 누렸던 데에는 ‘운’만이 아닌 전두환이라는 인물 개인의 ‘노력’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보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그런 ‘노력’에 일생을 바쳤던 인물의 ‘기원’을 향해야 할 것이다.

공개적으로 다루길 선택했다는 것은 회고록의 필자가 그 사건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도 되지만, 그 사건이 필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증거가 되기도 한다.

회고록 3권 첫 장에 기술된 문장을 여러 번 읽으며 당시의 전두환이, 전두환의 아버지가, 전두환의 어머니가 되어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행간을 곱씹던 자는 어느 순간 이 두 사건이 전두환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1) 말로 해결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기 앞서 실천으로 옮기고 보는 아버지의 행동파적인 기질과, 2)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사랑. 전두환의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이 두 가지 특성은 성년기 이후의 전두환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이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전두환은 직접 쓴 회고록을 통해 제 선천적·후천적 기질의 기원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

그저 제 안에 있었던 열망, 즉 열심히 움직여 권력을 움켜쥐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는 강력한 바람을 필터 삼아, 박정희라는 복잡한 인간이 함유한 다양한 특성 중에 가장 잔인하고, 가장 권위적인 것만을 취사선택해 제 몸에 갖다 붙였다.

이 일화에는 앞으로 전두환이 벌일 일들에 대한 암시가 촘촘히 박혀 있다.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욕망, 다른 이들보다(공사나 해군보다 우리가 먼저!) 앞서서 해내고 싶다는 승부욕, 생면부지의 고위 인사를 찾아가 손을 내미는 자신감, 자신이 가진 유리한 배경 조건(육사 참모장의 사위라는)을 민첩하게 알려 상대의 호감을 사는 주도면밀함,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면 즉시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달려가는 기민함,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는 저돌성, 자신을 받쳐줄 세력을 만들어내고 이끄는 조직 장악력, 사후에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노련함.

문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뜻을 관철시키며 승승장구한 전두환에게는, 겸손이나 성찰, 반성 같은 덕목을 일깨워 줄 사람이 없었다. 그가 성장했던 시기는 공동체를 지탱해 온 기존의 규범이 무너져 내리며 외부에서 들어온 가치관이 난잡하게 뒤섞이는 혼란기였다. 국가 공동체 전체가 식민지 시기와 분단을 지나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했기에, 먹고사는 문제가 구성원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로 떠올랐다. 윤리나 규범은 일단 살아남아야 따질 수 있는 가치가 아니겠는가.

1) 타고난 적극성, 2) 가난이라는 결핍, 3) 군인으로서 받았던 교육. 이 세 요인은 상황에 따라 위인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비옥한 토양이다. 적극적인 성향은 적시에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 능력이 가미되기만 하면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가난이라는 결핍은 작은 풍요에 기뻐할 줄 아는 긍정적인 성정과 약자의 입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군인으로서 받은 교육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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