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뒤인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로 가기 전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태는 우리 민족사에 불행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뒤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전두환이 했던 발언 중 가장 ‘참회’에 가깝게 다가간 발언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못을 규명하거나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은 그 발언을 온전한 ‘참회’나 ‘사과’로 볼 수는 없다.

그저 ‘현재의 나’가 무사히 살아남아 안녕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를 피상적으로, 철저히 자기 위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응한 것은 그런 그의 근본적인 기질, 즉 ‘현재, 여기, 나’만 보고 사고하는 특성,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에게 완벽하게 둔감할 수 있는 그의 탁월한 능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고려 대상이 단일한 한 사람, 오로지 ‘나’밖에 없는 전두환에게는 다른 요인에 대한 고민으로 속을 끓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용감하게 덤벼들어 사건을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전두환을 ‘나이브’하다고 평한 허화평의 안목은 정확했다. 오직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들의 눈에 순수, 의리, 용맹, 카리스마 같은 가치의 상징으로, 동시에 단순, 무식, 잔인, 독선, 나이브함과 같은 무지성의 아이콘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고(혹은 중시한다고 대외적으로 무척 강조하고),

전두환은 당황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정규군이 국민을 살상했다는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덮을 수 없는 대형 악재였다. 전두환은 알았을까. 자신의 무신경과 특유의 낙천성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을 추동했다는 것을.

공존하기 어려운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내보이는 이런 인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키워드는 ‘가벼움’이다. 그의 90년 인생을 뒤쫓다 보면, 전두환의 내면에 어떤 막이 존재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면의 일정 깊이 이하로 내려갈 수 없도록 만드는 단단한 막이 존재해, 그 내면의 소유자가 언제나 의식의 표면과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게 했으리라는 상상을. 이 막의 기능으로, 특정 사건과 마주쳤을 때 전두환은 그 사건을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 있었다. 핵심을 파고들어가 진상과 대면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현상에 표면에 머물다가 내상을 입기 전에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의 인생 전반기의 세속적 영광, 정통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냈던 대통령 재임 기간의 모순적인 상황, 사과하지 않은 채 끝없이 국민에게 지탄받았던 33년간의 길고 기나긴 몰락은 모두 그의 일정한 기질에서 연유했다고. 전두환의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특별한 가벼움이라고.

5공화국을 살았던 국민이 만끽했던 것은 어떠한 자유였는가? 배고픔에 포박된 상태로부터의 자유였다. 두둑해진 지갑을 들고 밤새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길 자유였다. 색채로 가득 찬 자극적인 스크린과 브라운관 화면을 보고, 외국에 나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낯선 공간의 공기와 음식을 맛볼 자유였다. 한 마디로, ‘몸’ 혹은 ‘감각’과 관련된 자유였다.

이런 이미지는 먹고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이들에게 더욱 여과 없이 전달된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를 파헤쳐 볼 만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나라’가 정해놓은 규칙과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른다는 엄포가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라’로 보이는 이미지들에 순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국가 운영을 잘 해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력 있는 인재를 기용해 공동체가 잘 돌아가게 만들면 그 인재가 세운 공이 그대로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발탁한 인재가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 얼굴과 다리가 되어 자신을 보호할 것이고, 훗날 단죄의 시간이 오면 자신의 일부가 된 이들이 세운 공로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면 될 것이었다.

그는 정통성이 없는 대통령이었기에 역설적으로, 경제와 같은 핵심 분야에 반드시 ‘실력 있는’ 인재를 써야 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각 분야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을 찾아내 자리에 앉힌 뒤 권한을 몽땅 위임하는 ‘통 큰’ 리더였다. 분야의 일인자를 찾아내 장관으로 임명한 뒤엔 차관 이하 그 부서 인재에 대한 인사권을 전부 그 장관에게 주었다. 하지만 정권 보위를 위한 자리, 이를테면 안기부장이나 내무부 장관(경찰 지휘권을 가진), 국방부 장관 같은 자리에는 철저히 철저히 측근들을 기용했다.

자신이 진정 떳떳하다고 생각했다면 길게 늘어지는 변명을 세 권이나 되는 책으로 만들어 출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쓴 회고록을 읽는 것은 뜻밖의 위로를 준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던 독재자, 제게 잘못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듯 보였던 독재자였지만 내면은 편치 않았구나. 오죽했으면 저렇게 시뻘겋게 속을 드러내 보이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이런 몇 가지 예시만 보아도, 정통성 없는 독재자의 존재가 한 국가의 국익에 얼마나 큰 손해를 초래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정통성 없는 지도자는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안보와 교역, 민생과 치안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이렇듯 조금 떨어져서 인생 전체를 놓고 조망해 보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무인 대통령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고 좇았던 군인, 가시적인 것 이면에 도사린 함의를 볼 지성이 없었던 쿠데타 주역 전두환이 만일 1979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는 그때도 12·12를 일으킬까? 정상에 오르기 위해 저질렀던 일이 평생에 걸쳐 치러야 할 불안과 사천만 국민들로부터의 증오라는 죄과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도 국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를까?

그와 그의 가족이 느꼈을 불안과 억하심정을 생각해 보면 전두환이 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감옥 밖에서 여생을 보낸 것이, 남은 생 내내 감옥에 머물며 모든 걸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뒤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보다 더 정교하고 강력한 단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의 주요 임무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내재한 다양한 욕망을 조율해 내는 일이다.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시선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고, 심지어 한 사람의 내부에도 상충하는 정반대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정치인은 누군가가 표방하는 말이 실제 그 사람이 욕망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언제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이 상대하는 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기민함도 장착해야 한다. 상대의 내면에 도사린 진짜 욕망을 알아야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거나, 부분적으로 충족시켜 주거나 아예 억누르도록 유도할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정치인 자신에게 내재된 다양한 욕망을 읽어내고 대면하는 능력이다. 제 안의 욕망을 읽어낼 줄 알아야 타인의 욕망도 읽어낼 수 있는 법이므로. 그런데 수많은 타인과 만나 그들의 욕망을 읽어내야 하는 정치인이 그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의 발생 원인을 정치인 자신에게서만 찾거나,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들에서만 찾는다면, 그 정치인이 이끄는 공동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정치인은 국가적·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문제라 명명하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엉뚱하게 문제를 설정할 경우 문제가 아닌 것이 문제로 명명되거나, 진정 문제로 삼아야 할 일을 전혀 문제로 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전두환은 자신과 다른 역사를 가진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식의 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전두환이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범위가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우로 한정된다는 것.

이 문제는 상상력의 차원에서 답을 찾으면 한결 이해하기 수월해진다. 전두환은 상상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 그래서 내가 잘해주면 결국 그 결과가 내게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진정한’ 타인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낯선 생명체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인지하고 그의 희로애락을 떠올려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나의 유한함을 직시한 사람만이 타인의 유한함을 알아보고 연민할 수 있는데, 자신의 결함과 마주 서서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없는 사람은 관성적으로, 그저 내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누군가 접근해 오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나서서 호감을 표하고 손을 내미는 편이었다. 백담사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분노하고 서운해했으면서도 노태우에게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했고, 재임 당시 그토록 제거하려고 노력했던 ‘용공 분자’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자신을 ‘전임 대통령’ 자격으로 초대했을 때 반색하며 청와대로 달려갔다.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김영삼의 부고를 들었을 때도 장례식장에 가서 조의를 표했다.
이후 전두환은 틈날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가 가장 좋았다’고 회고하며 전임 대통령으로서 초대받고 대접받은 것에 대한 기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회고록에서 박철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권위를 세우려 들고 독선적인 기분에 빠지는 듯하다. 때문에 충격적 대응이나 과격한 조치를 지시하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이런 때 핵심 참모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당장 확정 집행될 일이 아닌 경우에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치밀하게 준비하는 자세를 보이고, 대통령도 차츰 장·단점, 문제점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몇 차례 요약·정리·보고하여 결국 대통령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향성이 강한 인물은 사람을 모으고, 설득하고,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외향형 친구와 가까이하며 그 친구가 쟁취해 낸 기회와 그에 따른 인맥을 공유하고 싶어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 친구의 생각 없음과 사려 깊지 못함을 비판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직 법리로만 따져 자신을 변호하는 220페이지의 서술에서, 전두환이 그때껏 해왔고 재판이 끝난 뒤에도 반복적으로 내보이게 될 그의 내면의 핵심 특성 중 하나가 엑기스 형태로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우기’이다.

대한민국을 겉과 속이 다른 공동체로 파악한 건 김대중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은 서구에서 몇백 년 동안 숙성된 제도를 갑작스럽게 이식해 와야 했던 아시아 변방의 분단국, 분단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전쟁을 겪은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이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사상(왕조 시대의 수직적 신분제와 만민평등사상에 바탕한 민주주의라는)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1980년 5월, 재야 지도자들이 "모든 군인들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들은 해머를 놓고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공원으로 모여라."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려 했을 때 김대중은 펄쩍 뛰며 말렸다. 그렇게 과격한 성명을 내면 혼란을 원하지 않는 대다수 국민이 돌아설 테고, 이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신군부에게 무력을 동원할 빌미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이유였다. 결국 재야인사들은 기존의 과격한 주장을 접고 "계엄령 즉시 해제", "전두환·신현확 퇴진"으로 수정해 성명서를 냈고,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은 채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변화 속도에 대한 믿음의 차이’라는 말이 있다. 보수는 사회의 변화가 ‘제도 신설’에 의해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으니 기존의 사회적 관례를 급하게 바꾸기보다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살펴가며 차근차근 바꾸자고 주장하고, 진보는 그렇게 늑장을 부리다가는 기득권 세력의 현상 유지 기도 때문에 영원히 바뀌지 않을 테니 제도를 바꾸어 단번에 확연하고 큰 변화를 이루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보수는 인간의 내면이 선이나 악, 둘 중 한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니 복잡한 인간 심성을 고려해 제도적 강제를 실현하는 데 신중을 기하자고 하는 반면, 진보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정해서 이끌지 않으면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의 내면에 있는 악이 승리해 사회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고 전망한다.

다른 반대 진영 정치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과격한 주장을 펼쳐 대중들의 신망을 잃는 일이 빈번했는데, 김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김대중은 올바른 말을 하는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 그 말이 현실에서 어떤 파급력을 지닐지 면밀히 짚어보고 치밀하게 준비한 뒤에 말을 내놓았다.

강인한 외피를 두른 악인의 내부에 웅크린 작고 쭈글쭈글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량을 갖게 된 자는 더 이상 상대를 미워할 수 없게 되는 법이므로.

전두환을 향한 단죄와 용서가 이처럼 최고 결정권자의 사적 동기로 가해졌다는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가 아직도 특권층의 사회이며, 결정권을 쥔 소수 인물의 사적 동기에 따라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는 단계를 넘어갔음에도 그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에게 가해진 마지막 단죄의 철퇴는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왔다. 회고록에 5·18 당시 헬기 사격 목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써서 허위사실유포죄로 고발당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은 87세였다.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행적을 세세히 기록해 남기길 원했다. 진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듣기 좋게 윤색된 버전으로. 후대에 남기는 회고록에까지 거짓말을 남발했다는 것은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까지 진실을 침소봉대(
針小棒大)할 수 있다 여겼음을 보여준다. 퇴임 후 30여 년이 흘렀건만, 크고 작은 수많은 매질을 당했건만, 전두환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조악한 거짓말로 역사의 심판을 비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 부인’은 그러한 여성의 자리를 모두 모아 집대성하고 상징성을 얹어 부풀려 놓은 자리다. 공적인 책임이 없지만 실질적인 책임이 막대하고, 일에 대한 결정권이 없지만 일이 잘못될 경우 우회로를 통해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책임과 인과관계가 모두 비공식적인 경로를 따르기 때문에, 비판과 단죄도 비공식적이고 감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통로를 통해 온다. 바꿔 말하면, 대통령 부인이라는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은 개인의 대처 방식에 따라 성격이 판이하게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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