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전두환이 제 원죄에 대해 전면 부정함으로써 그가 영원히 ‘공’에 해당하는 사항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너무나 큰 죄를 저질러놓고 그에 대해 일말의 사죄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정체성은 오직 하나, ‘살인자’로 귀결되어 버렸다. 그가 세상을 향해 "내가 잘한 점도 있었잖아!’"라고 외칠 때마다, 세상은 그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를 인식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더 커다란 죄를 낳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죄의 부피에 압도되어, 전두환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갖고 있었을 ‘부분적인 미덕’이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

전두환이 자신에게, 후손들에게, 국가 공동체 전체에게 끼친 세 가지 불행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단연코 마지막 요소, 국가 공동체 전체에게 끼친 영향이다. 뉘우치지 않고 간 거악(巨惡)의 존재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황을 있었던 그대로 들여다보고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각각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 과거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나갈 토대로 삼을 수 있게끔 방향을 설정하는 법,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파악하고 현실에 적합한 선에서 이상을 지혜롭게 실현하는 법,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설정해 희생양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법과 같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보유해야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전두환 시절에 경기가 좋았던 것은 1985년의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나타난 3저(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호황이라는 외부 요인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라고 외쳐보았자 이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특권을 타고난 이들은 어쩌면 그 특권으로 인해 행복에 대한 일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전두환은 우리가 지나온 한 세기를 보여주는 인물, 시층이 겹겹이 쌓인 한반도의 20세기를 보여주는 절단면 같은 인물이다. 홉스적 자연 상태에 놓여 아비규환의 지옥을 살아내던 개개인이 다시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돌연변이이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구성원 전체가 그 생물체의 파편을 지니고 가게 된 우리 사회의 대자아이기도 하다.
전두환을 읽어내는 일은 한국을 읽어내는 일이고, 자신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국민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전두환의 육신은 갔지만 우리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다. 그의 육신이 떠난 지금, 그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가 한국사의 정확한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존재했던 한 인물의 행적을 우리 사회 발전의 불쏘시개로 삼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시간이다.

스물일곱의 청년 전우원이 나타난 것은 이런 고민에 빠져 있던 때였다. 선악에 대한 선명한 답을 도출해 내지 못해 씁쓸해하던 내 눈앞에, 전두환의 심장을 나누어 가진 청년이 나타났다. 선명한 발음으로 조부를 학살자라 칭하고, 광주로 날아가 유족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나는 넋을 잃었다. 이것이 역사로구나! 겁 많고, 힘을 맹신하며,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던 장대한 무인 스토리의 끝이 그 무인의 손자가 출현하는 장면으로 끝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무인의 혈육이 그토록 순도 높은 사과를 내놓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전두환의 손자가 만들어낸 이 대단원은 빛과 어둠 간 승부에 대한 강력한 답이다. 권선징악은 단번에 깃들지 않는다는 것. 근대가 그렇게 왔듯 권선징악 또한 굽이굽이 돌아온다는 것. 대로를 통해 단번에 달려오지 않지만, 또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오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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