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품은 자아상 속에는 살인자라는 이미지가 섞여 있었을까? 섞여 있었다면 함량이 얼마큼이었을까. 아니면 정녕, 진심으로, 온전히, 그의 자아상은 구국(救國)의 영웅이었을까? 그게…. 가능한가? 어쨌든 그도 인간인데? 그에 대한 답을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영원히.

잘못을 저지른 이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일 경우, 제 잘못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의 인격과 삶이 이미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기에, 무엇이 자신의 과오이고, 무엇이 시대·문화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따지는 작업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역사적인 인물의 행보를 추적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 인물의 성격적 특성을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특정 인물의 행동을 가능케 한 역사·문화적 상황을 살피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33년이라는 기간 동안 왜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는지, 왜 우리 사회는 그를 단죄하지 못했는지를, 전두환이라는 특별한 개인의 내재적 관점과 그가 속해 있던 시대적 상황이라는 외재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제대로 규정되지 않은 ‘악’은 물리적 생명력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남아 현재를 만들어내고, 미래에도 줄기차게 영향력을 이어간다. 그 영향력을 끊어내는 첫 단계는, 우리의 기억 저편의 시공간으로 넘어가 버린 ‘단죄받지 않은 악인’의 면모를 구석구석 살펴서,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박혀 단단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파편들을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행운의 덕을 보았다 할지라도, 그 운의 수혜자가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결과를 맞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두환이 숱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속세적인 의미의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천수를 누렸던 데에는 ‘운’만이 아닌 전두환이라는 인물 개인의 ‘노력’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보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그런 ‘노력’에 일생을 바쳤던 인물의 ‘기원’을 향해야 할 것이다.

공개적으로 다루길 선택했다는 것은 회고록의 필자가 그 사건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도 되지만, 그 사건이 필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증거가 되기도 한다.

회고록 3권 첫 장에 기술된 문장을 여러 번 읽으며 당시의 전두환이, 전두환의 아버지가, 전두환의 어머니가 되어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행간을 곱씹던 자는 어느 순간 이 두 사건이 전두환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1) 말로 해결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기 앞서 실천으로 옮기고 보는 아버지의 행동파적인 기질과, 2)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사랑. 전두환의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이 두 가지 특성은 성년기 이후의 전두환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이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전두환은 직접 쓴 회고록을 통해 제 선천적·후천적 기질의 기원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

그저 제 안에 있었던 열망, 즉 열심히 움직여 권력을 움켜쥐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는 강력한 바람을 필터 삼아, 박정희라는 복잡한 인간이 함유한 다양한 특성 중에 가장 잔인하고, 가장 권위적인 것만을 취사선택해 제 몸에 갖다 붙였다.

이 일화에는 앞으로 전두환이 벌일 일들에 대한 암시가 촘촘히 박혀 있다.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욕망, 다른 이들보다(공사나 해군보다 우리가 먼저!) 앞서서 해내고 싶다는 승부욕, 생면부지의 고위 인사를 찾아가 손을 내미는 자신감, 자신이 가진 유리한 배경 조건(육사 참모장의 사위라는)을 민첩하게 알려 상대의 호감을 사는 주도면밀함,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면 즉시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달려가는 기민함,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는 저돌성, 자신을 받쳐줄 세력을 만들어내고 이끄는 조직 장악력, 사후에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노련함.

문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뜻을 관철시키며 승승장구한 전두환에게는, 겸손이나 성찰, 반성 같은 덕목을 일깨워 줄 사람이 없었다. 그가 성장했던 시기는 공동체를 지탱해 온 기존의 규범이 무너져 내리며 외부에서 들어온 가치관이 난잡하게 뒤섞이는 혼란기였다. 국가 공동체 전체가 식민지 시기와 분단을 지나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했기에, 먹고사는 문제가 구성원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로 떠올랐다. 윤리나 규범은 일단 살아남아야 따질 수 있는 가치가 아니겠는가.

1) 타고난 적극성, 2) 가난이라는 결핍, 3) 군인으로서 받았던 교육. 이 세 요인은 상황에 따라 위인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비옥한 토양이다. 적극적인 성향은 적시에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 능력이 가미되기만 하면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가난이라는 결핍은 작은 풍요에 기뻐할 줄 아는 긍정적인 성정과 약자의 입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군인으로서 받은 교육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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