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에 대한 다자이의 글

˝나는 이 단편집 한 권을 위해 십 년을 허비했다. 만 십 년,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로 산뜻한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 한권을 위해 몸 둘 곳을 잃은 채 끊임없이 자존심에 상처 입고 세상의 휘몰아치는 찬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다.(...)
혀를 데고 가슴을 태우고, 내 몸을 도저히 회복되기 어려울 만치 일부러 망가뜨렸다. 백 편이 넘는 소설을 찢어 없앴다. 원고지 5만 매. 그리고 남은 건 겨우 이것뿐이다. 이것뿐.(...)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단편집 <만년>은 해가 갈수록 더욱 더욱 더 선명하게 그대의 눈에, 그대의 가슴에 침투해 갈 게 틀림없음을.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어찌 되었든 <만년> 한 권, 그대의 두 손때로 검게 빛날 때까지 몇 번이고 거듭 애독될 것을 생각하면, 나는 아아 행복하다.

다자이는 <만년>을 세상에 내놓기 전 <<문예잡지>>(1936년)에 이렇게 썼다. 비교적 짧은 글임에도 뭔가 비장한 결의와 자부심이 묻어난다.
<만년>은 단편 열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첫 창작집이다.‘만년‘이라는 작품은 없다. 스물 일곱 살의 청년이 자신의 첫 작품집에 ‘만년‘이라는 제목을 단 이유, 작가의 말을 빌리면,

˝나는 완성된 작품을 큼직한 종이봉투에 서너 편씩 채워갔다. 차츰 작품 수도 늘었다. 나는 그 종이봉투에 붓으로 <만년>이라 썼다. 그 일련의 유서에 붙인 제목인 셈이었다. 이제, 이걸로, 끝이라는 의미였다.<도쿄팔경>‘

<만년>에 대해(1938)라는 다자이의 글
˝내 소설을 읽은들, 당신의 생활이 전혀 편해지지 않습니다. 전혀 훌륭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러니, 나는 그다지 권할 수 없습니다. <추억>을 읽으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분명 당신은 폭소를 떠뜨리겠지요. 그걸로 됐습니다. <로마네스크>도 우스꽝스러운 영망진창으로 가득한데, 이건 좀 스산해서, 그다지 권할 수 없습니다.˝

-<만년> 작품해설 中에서


10번째 단편 <역행>

역행은 다자이의 나이 26세(1935년)에 쓴 단편이다.
제1회 아쿠타가와상에서 아깝게 차석에 머무른 작품으로 작가 사토 하루오를 방문, 이후 사사하게 된다.

역행 단편 속 짧은 글 4편이 나온다.
<나비>,<도적>,<결투>,<검둥이>로 이루어져 있다.

˝노인은 아니었다. 스물 다섯을 넘겼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노인이었다. 보통 사람의 일 년 일 년을, 이 노인은 넉넉히 세 배로 살았다. 두 번, 자살에 실패했다.˝ - 197쪽


플로베르는 철부지다. 제자인 모파상은 어른이다. 예술의 미는 결국, 시민에 대한 봉사의 미다. 이 슬픈 체념을 플로베르는 몰랐고 모파상은 알았다. 플로베르는 자신의 처녀작 <성 앙투안의 유혹>에 대한 악평의 굴욕을 씻고자 일생을 허비했다.(...)
걸작의 환영에 속고 영원의 미에 매혹당하고 들떠서, 결국 한 사람의 천지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구제할 수 없었다. 보들레르야말로 철부지 이상. 이상. -202쪽

절대 고독과 온갖 회의, 입 밖에 내면 추잡해! 니체, 바이런, 하루오 보다도 모파상, 메리메, 오가이가 진짜인 것 같았다. -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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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호쿠 지방 아오모리현의 쓰가루 지역을 여행하고 싶게 만든 작품이다.


첫 문장

"글쎄, 왜 여행을 떠나요?"

"괴로우니까"

본편의 첫 제목을 '순례'라고 한 까닭, 여기에 있는 듯하다.


마지막 문장

"안녕히! 독자여, 목숨 있거든 또 훗날, 힘차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 그럼 실례"


<쓰가루>의 마지막 명장면에서 다자이는 30년 전 자신을 돌봐 준 보모 다케를 찾아 길을 나선다.


다자이 집안에 귀속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의 소작밎을 덜기 위해 14살에 하녀가 되고, 3살 쓰시마 슈지(다자이)를 약 6년간 도맡아 키우면서 '아무리 어려도 상대는 도련님, 나는 하인'임을 자각하려고 애썼다는 다케, 미래의 작가에게 책 읽는 법과 책 사는 법을 알려준 것도 다케였다. 다케는 스물 한 살에 이 고갯길을 넘어 코도마리 철물첨에 후처로 들어가고, 아이 열한 명을 낳지만 여섯 명이 죽는다.


이번에 내가 쓰가루에 와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어머니라 여기고 있다. 삼십여 년이나 만나지 못했음에도, 나는, 그 사람 얼굴을 잊지 못한다. 나의 일생은, 그 사람으로 인해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191쪽


내 어머니는 병약했으므로, 나는 어머니의 젖은 한 방울도 먹지 못해 태어나자마자 유모 품에 안겼고, 세 살이 되어 아장아장 일어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유모와 헤어져 그 유모 대신 보모로 고용된 이가 다케다. 나는 밤에는 이모에게 안기어 잠들었지만, 그 외엔 언제나 다케와 함께 지냈다. 세살부터 여덟 살까지, 나는 다케한테 교육받았다. -193쪽


철물점의 고시노, 청년은 생각하다가 '아, 건너편 저쪽 천막에 있었던 것 같은데' -203쪽



다자이는 혼슈 서북쪽의 최북단 항구에 있는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다케가 살고 있다는 철물점앞에 도착한다.


 <다케의 철물점이자 집이 있던 곳> 


집에 없어서 물어보니 자녀 학교의 운동회 축제에 갔다고 해서 가니 찾지를 못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까 망설이는데 다시 돌아온 다케의 집에서 그녀의 어린 딸을 만난다.

" 돌아가자, 생각해 보면, 아무리 키워 준 부모라고 해봤자, 노골적으로 말해 고용인이다. 하녀가 아닌가!

너는, 하녀의 자식이냐? 남자가 나잇살 먹고선, 옛 하녀를 그리워하며 한 번 만나고 싶다느니 뭐라느니, 그 모양이니까 넌 글렀다는 거야. 형들이 너를, 천박하고 사내답지 못한 녀석이라고 한심스레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넌 형제 중에서도 혼자만 다르게, 어째서 이토록 칠칠하지 못하고, 추접스럽고, 상스러운 건지! 어서 정신 차려!"

- 205쪽


나는 다케의 자식이다. 하녀의 자식인들 뭔들, 상관없어, 나는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어. 난 다케의 자식이야. 형들에게 경멸당한 들 괜찮아. 난, 이 소녀와 형제야 - 206쪽


그녀의 딸을 앞세워 학교 운동회의 천막에서 드디어 30년만에 다케를 만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대목이 될 것 같다


이젠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괜찮다. 싶은 그야말로 아무근심 없고 평온한 상태다. 평화란 이런 기분을 말하는 걸까?

만약 그러하다면, 나는 이때 태어나 처음 마음의 평화를 체험했다고도 할 수 있다. 몇 해전 돌아가신 나의 생모는 기품 넘치고 온후하며 훌륭한 어머니였지만, 

이렇듯 신기한 안도감을 내게 전해 주지는 않았다. 세상의 어머니라는 존재는 모두, 그 자식에게 이처럼 달콤한 방심(放心)의 휴식을 전해주는 것일까 - 208쪽


<다자이가 그린 다케의 얼굴>


아아! 나는 다케를 닮았다, 생각했다. 형제 가운데 나 혼자, 세련되지 못하고 덜렁대는 구석이 있는 건, 이 슬픈 키워 준 부모의 영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내 성장의 본질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나는 결코 고상하게 자란 남자가 아니다. 그러하니, 부잣집 아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보라! 내가 잊지 못하는 사람은 아오모리에 있는 T군이고, 고쇼가와라에 있는 나카하타 씨이고, 가나기에 있는 아야이고, 그리고 고도마리에 있는 다케다. - 213쪽


나는 허식을 부리지 않았다. 독자를 속이지는 않았다.

안녕히! 독자여, 목숨 있거든 또 훗날, 힘차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 그럼, 실례



아오모리 지역 곳곳에는 다자이를 기념하는 장소가 마련되고 있어, 문학 팬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쓰가루>와 관련해서는 다케와 다자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모습의 브론즈 동상이 고도마리에 세워졌다.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다. '재회 공원'이라 이름 붙은 그 자리에는 문학비와 더불어 소설 <쓰가루>동상 기념관이 아담하고 알찬 꾸밈새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다케와 다자이 동상>


다큐 요소가 가미된 픽션 <쓰가루>의 라스트 신은 그야말로 잊히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조형술에 더해 최고의 문장가 다자이의 필력이 빛나는 백미다. 아래는 다자이를 만난 다케의 말이다. 이 부분에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어, 가나기의 쓰시마, 라고 우리 아이가 말했지만, 설마 싶었지. 설마, 와 주리라곤 생각을 못했어. 천막을 나와서 네 얼굴을 봐도, 못 알아봤지. 슈지다, 라는 말에 어머? 싶었는데, 그러고 나선 입이 떨어지지 않더구나. 운동회고 뭐고 하나도 안 보였어. 삼십 년 가까이 다케는 널 만나고 싶어서, 만날 수 있으려나, 만날 수 없으려나,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며 지내 왔는데, 이렇듯 번듯하니 어른이 돼서, 다케가 보고 싶어서, 멀고 먼 고도마리까지 찾아와 주었는가 생각하면, 고맙다고 할지, 기쁘다고 할지, 슬프다고 할지, 그런 것쯤이야 아무려면 어때, 그래, 잘 왔구나! 네 집에 고용살이하러 갔을 땐 너는 아장아장 걷다가는 넘어지고, 아장아장 걷다가는 넘어지고, 아직 잘 걷지 못했는데, 밥 먹을 땐 밥그릇을 들고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곳간의 돌계단 아래서 밥 먹는 걸 제일 좋아했고, 다케한테 옛날 이야기를 졸라 대고는, 다케 얼굴을 말똥말똥 보면서 한 숟가락씩 먹는 통에 품이 꽤 들기는 했어도 얼마나 귀여웠는지! 그랬는데 이처럼 어른이 됐으니, 모두 꿈만 같구나. 가나기에도, 이따금 갔지만, 가나기 마을을 걸으면서, 혹시라도 네가 그 언저리서 놀고 있지나 않을까 싶어, 너와 비슷한 또래 남자아이를 한 명 한명 씩 살피며 걷곤 했단다. 잘 왔구나" 한마리 한마디, 말할때마다 손에 든 벚나무 잔가지의 꽃을 정신없이 잡아 뜯고선 버리고, 잡아 뜯어선 버리고 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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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에 매료되고
<사양>에서 유채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맛보고,
<쓰가루>에서 다자이의 작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첫 창작집 <만년>과 그 이후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를 읽어버리면 이제는 2016년에 작고한 다자이의 딸 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쓰시마유코의 딸 이시하나 넨의 <붉은 모래를 박차다>을 읽으면 이젠 다자이에서 나온 작품은 끝인가?

아쉬워하며 이래저래 뒤적이다가 전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탄식이..

짧은 독서 경력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에서 강력한 망치로 두들겨 맞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사막에서 헤멨고, 도올의 <노자>에서 동양철학의 진수를 맛보고 그의 철학, 예수, 동학 등에 탐독을 해왔었고, 하루키의 단편, 에세이, 장편의 전독 대장정을 끝냈다. 허세라면 허세고, 위선이라면 위선이지만, 그저 묵묵히 읽어왔던 사실은 틀림이 없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별도로 치더라도 나름의 책부심이 있다는 건 내 독서 여정에 큰 도움이 된다.
덧붙여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사랑해왔었고, 그의 작품도 연도별로 애정하며 기나긴 시간을 함께 해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오늘부로 내 인생의 작가와 작품에 다섯 손가락을 펼친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벌>
도올<노자이야기>
무라카미하루키<노르웨이의숲>
헤르만헤세<데미안,싯다르타>에
당당히 다자이 오사무<쓰가루,인간실격>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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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15개중 2번째
<추억> P.25~72

다자이 오사무의 가족관계

쓰시마겐에몬(夫)-쓰시마다네(母)
사이에 7남4녀중 10번째로 태어남

1. 쓰시마소이치로(남)-요절
2. 쓰시마타마(여)-22세 사망
3. 쓰시마긴사부로(남)-요절
4. 쓰시마토시(여)
5. 쓰시마분지(남)
6. 쓰시마메이지(남)
7. 쓰시마케이지(남) : 27세 사망
8. 쓰시마아이(여)
9. 쓰시마키요(여)
10. 쓰시마슈지(다자이오사무)
11. 쓰시마레이지(남) : 18세 사망


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1944년)>를 읽다가
˝나는 중학 시절에는 남의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전혀 없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같은 반 N군 집에는 참으로 뻔질나게 놀러 갔다.˝(...)

<추억>이라는 내 초기 소설에 나오는 ‘친구‘란 대개 이 N군을 가리킨다. - <쓰가루> 52쪽

라는 내용을 보고 다자이의 첫 창작집 15편이 실린 <만년(1936년)> 속 <추억>이라는 소설부터 읽고 다시 쓰가루로 돌아가려고 한다.

◇단편 <추억> 속 밑줄긋기

나는 다케라는 하녀에게 책 읽는 것을 배워 둘이서 여러 책을 함께 읽었다. 다케는 내 교육에 열심이었다. 나는 몸이 허약한 탓에 누워서 많은 책을 읽었다. -27쪽

거짓말은 나도 줄곧 했다 -30쪽

학교에서 쓴 내 작문도 죄다 엉터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얌전하고 착한 아이로 지어내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언제나 모두에게 갈채를 받는다. 심지어 표절도 했다.(...)
나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공부한 기억이 도통 없다. 나는 학교를 싫어했고, 따라서 교과서 따위를 공부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락 책만 읽었다. 집에서는 내가 책만 읽고 있으면 공부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가 작문에 진실을 써 넣으면 어김없이 결과가 좋지 않았다. - 31쪽

아버지는 굉장이 바쁜 사람이라 집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집에 있어도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다.(...)
어머니와도 나는 친해질 수 없었다.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 숙모의 품에서 성장한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쓸쓸한 추억이 많다. -32~33쪽

가족들은 내 용모가 형제들 가운데 제일 시원찮다, 시원찮다 했고,(...)
내가 형제들과 밥상 앞에 앉아있을때, 할머니와 어머니는 내 얼굴이 못 생긴 것에 대해 진지하게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분했다.-34쪽

나는 초등학교 3,4학년 부렵부터 불면증에 걸려 밤 2시, 3시가 되어서도 잠들지 못한 채, 툭하면 이불 속에서 울었다. -36쪽

그 곳의 교사들은 나를 엄청 괴롭혔다. 나는 입학실 날부터 어떤 체조 교사에게 얻어맞았다. 내가 건방지다는 것이었다. 이 교사는 입학시험 때 내 구두시험 담당자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공부도 제대로 못 했겠구나,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에, 나도 고개를 푹 떨구어 보인 그 사람이었던 만큼 내 마음은 더욱 상처를 입었다. 그 후로도 나는 여러교사에게 얻어맞았다. 히죽히죽 웃는다거나 하품을 했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벌을 받았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46쪽

내 얼굴이 검푸른게 예의 안마(자위행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던 터라, 나는 사람들이 내 안색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비밀을 지적당한 듯 허둥거렸다. 나는 어떻게든 혈색을 좋게 하고 싶어, 스포츠를 시작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이 혈색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 왔다. -50쪽

나는 자긍심이 높았기 때문에 내 생각을 상대에게 털어놓는 건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 53쪽

내겐 열 겹 스무겹의 가면이 달라붙어 있어서, 어느 것이 얼마나 슬픈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 54쪽

미요는 어느 하인에게 딱 한번 더렵혀진 것을 다른 하녀들에게 들켜, 우리 집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남자는 그 외에도 이런 저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때는 이미 우리집에서 쫓겨난 뒤였다. 그렇긴 해도 청년은 말이 좀 지나쳤다. 미요는 나중에 그만해, 그만해, 하고 속삭였다고, 그 남자의 솜씨 이야기까지 보태어. -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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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사키 성
#히로사키 공원
#아오모리
#쓰가루
#아오리사과

히로사키 성이 지금도 여전히 천수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서 해마다 따뜻한 봄날이면 벚꽃에 에워싸여 그 건재함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로사키 성. 이 곳은 쓰가루번 역사의 중심이다. 쓰가루 번주의 시조인 오우라 다메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편에 가세하여 게이초8년(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쇼군 임명과 더불어 도쿠가와 막부 내 사만 칠천 섬 제후가 되면서 곧장 히로사키의 높다란 구릉에 성과 해자의 구획을 시작했다.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 때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을 본 것이 이 히로사키 성이라고 한다. (...중략)

이어 12대 쓰구아키라 시대에 무사히 번적을 반환해 여기에 현재의 아오모리현이 탄행했다는 경위는 히로사키 성의 역사인 동시에 또한 쓰가루 역사의 개요이기도 하다. 22쪽

히로사키 성에 대한 글을 읽으며 우연히 기사를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사건을 발견했습니다.
아래는 2026년 8월 26일자 연합뉴스 TV 기사입니다.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주민 1,800여 명이 밧줄과 롤러를 이용해 360톤짜리 성곽 건물을 손으로 끌어 옮기는 진풍경이 연출됐습니다.

현지시간 25일 영국 매체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 주말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히로사키 성의 천수각(성곽 망루)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주민들이 30m 길이의 밧줄을 들고 나섰습니다.

레일 위에 얹힌 천수각은 80명씩 조를 이룬 참가자들이 교대로 밧줄을 당겨 주말 이틀간 총 2m 넘게 옮겨졌습니다.

이번 작업은 지진으로 손상된 성벽을 보수하기 전에 천수각을 옮기기 위해 진행됐습니다.

히로사키시 공원녹지과장 하야사카 겐스케는 “지난 이틀간 1,800명 모집에 약 8,000명이 신청해 4배 가까운 경쟁률을 기록했다“며 “지역 주민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과 해외에서도 신청자가 있었고, 동남아시아와 유럽·북미에서 온 신청자도 상당수였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하야사카는 “천수각은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이기 때문에 해체하지 않았다“며 “일본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히키야를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히키야‘는 역사적 구조물을 보존하기 위해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롤러 위에 얹어 통째로 이동시키는 일본의 전통 기법입니다.

히로사키 시는 오는 8월 말까지 약 4,100명이 참여해 5m를 손수 옮긴 뒤, 남은 거리는 중장비를 동원해 이동시킬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히로사키 성. 사이쇼인의 오층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벚꽃 필 무렵의 히로사키 공원은 일본제일이라고. 다야마 가타이(일본 소설가. 적나라한 현실 묘사를 주장했으며, 대표작으로 <이불>,<시골 교사>등이 있음)가 보증했다고 한다. -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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