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단편 <해룡이야기>중에서
그 악몽의 현장, 그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이나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중호는 고향의 모든 것을 미워했다. 측간에서 똥 먹고 사는 도새기(돼지)가 싫고, 한 겨울에도 반나체로 잠수질해야 하는 여편네들이 싫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하는 속담이 싫고, 육지 사람이 통 알아들을 수 없는 고향 사투리가 싫고, 석다(石多)도 풍다(風多)도 싫고, 삼십년 전 그 난리로 홀어멍이 많은 여다(女多)도 싫고, 숱한 부락들이 불타 잿더미가 되고 곳곳에 까마귀 파먹은 떼송장이 늘비하게 널려 있던 고향 특유의 난리가 싫고, 그 불행이 그의 가슴속에 못 파놓은 깊은 우울증이 싫었다. 걸핏하면 버릇처럼 꺼질 듯한 숨을 내쉬는 어머니도 싫었다. 육지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牧民)에는 뜻이 전혀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를 살찌우는 목마(牧馬)에만 신경썼던 역대 육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이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159쪽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가
제주도를 알려면 4.3사건의 아픔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이 떠오른다.
노인, 어린아이 할것 없이 3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죄없이 죽었다.
70여년이 흘렀건만 옴팡진 밭담안쪽에서 집단학살당한 자들의 가족은 지금도 그날의 기억에 몸서리치며 살아간다.
'뽑아놓은 무처럼 널브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을 상징하는 순이삼촌비에서
딸아이와 함께했다.

'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 -<순이삼촌 中>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을 읽고, 영화 <지슬>을 보았고,
이제서야 순이삼촌을 가슴에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