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해방"과 "광복"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문이 막힌 것처럼,
누군가가 "신탁과 반탁"에 대해 물어보면 정확히 설명할 수 있나요?
[해방과 분단, 다섯번 째 마당]
- 역사를 바꾼 신탁통치 논쟁, 좌우익은 왜 그토록 싸웠는가?
찬탁과 반탁의 논쟁 이전에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 전문"을 읽어봐야 합니다.
8.15 이후 넉달동안 연합국은 한국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도 하지 않다가
1945년 12월 16일 미국,소련,영국 세 나라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만나 한국문제를 논의한 회의입니다.
총 4개항으로 이 책에 전문이 실려있는데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중략...)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중략...)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제안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후략...)
3. (전략...)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후략...)
4. (생략)
첫번째 항이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결의사항입니다.
즉,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대해 지지한다는 것은 신탁을 받아들인다는 한가지 사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에 대해 우선 지지한다"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후술하겠지만 "일단 정부수립부터 하고, 신탁에 대해서는 우리 정당과 사회단체 등과 협의해야 되니 그때 반대하면 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 여러 문건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해 우린 그동안 "신탁과 반탁"하나로만 배웠지,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대전제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2000년대 이후 국사 교과서는 달라져 상당히 정확히 기술하는 편이라고 본문에 쓰여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익이 반탁 투쟁을 했는 건 맞다, 그러나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오래된, 치명적인 오해를 근 반세기동안 붙들고 좌우익이 싸우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1945년 12월 16일 열리고, 결정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책에서 직접 발췌해보겠습니다.
"12월 24일 부렵부터 동아일보에 일방적으로 소련을 헐뜯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에 맞지도 않고 어떤 데서도 구체적으로 입증이 안 된 내용이었다. 12월 26일에는 이승만이 방송에서 '어느 나라에서는 한국을 독립시키려 하는데 다른 어느 나라에서는 신탁통치를 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정반대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12월 27일 자 보도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한다고까지 보도했다." - 본문 80쪽
이 신탁통치에 대해 친일파는 다시 한번 신분세탁을 합니다.
매국노, 민족 반역자에서 갑자기 애국자로 둔갑한 겁니다.
"친일파는 해방정국에서 두 가지를 통해서 변신이랄까 세탁을 한다. 하나는 반탁 투쟁,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단정(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다."- 본문 83쪽
"신탁 통치는 말할 것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반탁 투쟁이 특이한 형태로 일어난 면도 생각을 안 할수는 없다" - 84쪽
그러면 그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해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현명하게 처리하려 했는지 알아봅시다.
"그러니까 김규식 같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한거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키지 않으면 분단되고 분열을 겪는 건데,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제 1항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냐. 빨리 미소공동위에 협력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런 다음에 임시정부에서 신탁통치를 열화와 같이 반대하면 될 것 아닌가, 제3항에 임시정부하고 협의한다고 돼 있는데, 우리가 다 반대하면 되는 것 아닌가" - 85쪽
- 미 군정은 반탁 운동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지 사령관은 반탁 운동에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좋아했다.(...)
더욱이 미군정이 등용한 친일파는 한국인들로부터 민족 반역자로 매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친일파가 반탁 운동에 참여하면서 애국자로 둔갑했다. 그러니 하지는 '반탁 운동이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구나. 우익한테 정치적 헤게모니를 주다니
히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87쪽
- 3상회의 결정 전면 지지 의사 담은 4당 코뮈니케
한민당, 국민당(안재홍), 조선인민당(여운형), 조선공산당, 이 4당이 모여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했다. 그래서 1946년 1월 7일, 4당 코뮈니케라는 걸 결성하게 된다.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이렇게 돼 있다.
"신탁 통치(국제 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신탁 제도)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 독립의 정신에 바탕을 두어서 해결케 함" 신탁 통치에 관한 내용이 유엔 헌장에 있는데, 거기선 사실상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돼 있다."
김규식의 주장과 똑같지 않나, 임시정부를 먼저 세운 다음 신탁 통치 문제는 임시정부가 자주 독립의 정신으로 해결하자는 것 아닌가. 국제 헌장에 나오는 신탁 통치는 반대하겠다, 그걸 노골적으로 쓸 수 없으니까 이렇게 표현한 거다.
이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 한민당 대표로 온 김병로다. 김병로가 초안을 잡고 4당이 합의한 거다. 그러니까 우익, 특히 한민당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거다. 반탁 투쟁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다." - 89쪽
이런 상황에서 김규식과 여운형,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엄청 고심한 걸로 보인다.
미소 공위에 협조해야만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은 일단 결정에 지지한다고 했고, 김구를 비롯한 중경 임정요인은 "신탁 통치는 반대다" 라고 했다.
그런데 김규식이 이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결국엔 김구도 김규식의 말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대 그때 되서는 소련이 '반탁 투쟁을 하면서 코뮈니케 5호에 서명한다는 건 모순이고 뭔가 책략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틀어버린다. 그러면서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간다.- 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