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尹熙順) 1860.6.25~1935.8.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촬영)
-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사진 한장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사진 찍은게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비분강개해 시아버지가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을 창작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진력하였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이어 경고문 《왜놈 대장 보거라》를 써서 여성들도 의병활동에 나설 것임을 천명 하였다.
* 선생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 출처 : 네이버캐스트
1911년 가족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 후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으며 1912년 운영자금을 모금하여 동창학교(東昌學敎) 분교인 노학당(老學堂)을 설립 하였다. 노학당의 '연설 잘하는 윤교장'으로 불렸던 그녀는 이후 중국의 여러 마을을 돌며 반일 선전과 모금활동을 이어나갔으며 반일 정신을 심어주었던 노학당에서 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 윤희순 의사가 설립한 환인현 보락보진 ‘노학당’ 자리에 후손들이 세운 유지비. 오른쪽에 새겨진 ‘환인현 동창학교 분교’ 부분이 지워졌다 복구된 흔적이 보인다.
- 출처 : 세계일보
1935년 7월 큰아들 돈상이 제사를 지내러 집에 들렀다가 중국 푸순[撫順]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아들의 죽음앞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였던 그녀는 《해주윤씨 일생록》을 지어 삶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정리한 후 곡기를 끊어 숨을 거두었다. 1935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현[海城縣] 묘관둔(苗官屯) 북산(北山)에 안장되었던 유해는 1994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춘천시 남면 관천리(冠川里) 선영에 남편과 함께 합장 하였다. 춘천시립도서관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의 생가터에는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는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 추서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춘천시립도서관 뒷마당에 있는 동상
- 출처 : doopedia.co.kr
- 윤희순 의사 제85주기 추모 헌다례, 춴천의병아리랑 보존회 "초혼무" 2020년 8월 29일 개최
- 출처 : 강원도민일보
- 내용 출처 : 두산백과
- 두산백과의 내용을 요약하고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