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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제4장 제주4.3사건
황룡사탑9층의 각 층마다 대적세력의 이름이 정해져 있었는데,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제4층은 탁라 등등으로 되어 있다.(...) 신라에게 있어서 탁라, 즉 탐라는 일본이나 중화나 오월과 대등한, 황룡사 9층의 한 층을 차지할 만큼의 무게감 있는 왕국이었던 것이다. -181쪽
제주도문명을 이야기 할 때 보통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있다.(...) 제주에는 1만8천 신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제주에는 1만 8천 신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제주인들의 일상적 삶 모든 구석구석에는 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장 진화된 원형이며, 인간의 종교의식이 지향하는 가장 숭고한 궁극태이다. 종교의 가장 진실한 모습은 본래 제도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다신론의 개방태이다. 우리가 말하는 유일신론이란 인간세의 정치권력의 탐욕스런 진화에 수반되는 종교의식의 퇴화, 그 악폐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퇴화형태의 소산이 구약이 말하는 야훼 따위의 전쟁신이다. - 188쪽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평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평등이란 오직 원초적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이원적 가름 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악마이며,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믿는 자들의 눈에는 불신자들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근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생각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양한 인도주의적 교리해석이 생겨났지만 오늘날까지도 구교, 신교를 막론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 깔려있는 ˝배타성˝은 극복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중세기적 성격의 가치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그러한 가치관은 이미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이 지적한 바와 같다. - 191쪽
해주지역의 포교에 공이 큰 안중근이 뮈텔을 찾아가 황해도 고향에 대학교 건립을 요청하자,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고 개화되면 신앙심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고 하면서 거절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외국신부놈들 믿을 놈들 못 된다. 조선인의 각성에 근본적인 관심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독립투쟁에 전면키로 한 안중근의 사상역정은 본인의 명료한 진술로서 남아있다. 후에 뮈텔주교는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시켰으며, 로마가톨릭과의 관계를 전면부정하고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했다.
뮈텔은 한국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우월의식이 있었으며 한국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한국인 원로신부님 최석우의 증언) - 194쪽
제주도를 외딴 섬으로, 문화의식이 낮은 곳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유족하며, 교육적으로도 선진문물을 흡수하여 깨어 있었고, 국제적 감각이 있는 문화를 유지했다. - 209쪽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3.1정신으로 온전한 통일과 온전한 독립을 쟁취하자! 외세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목힘줄이 끊어져라 힘차게 외쳤던 것이다. 제주도민 전체가 ˝외세에 의존하면 남북분열이 초래될 뿐이고, 분열이 초래되어 단독정부가 남북에 들어서면 민족상잔의 전쟁이 불가피해진다˝는 논리를 정확히 궤뚫고 있었다. -211쪽
1946년 8월 1일, 미군정은 전라도에 속했던 섬이었던 제주를 ˝도(섬:도)에서 독립된 도(길:도)로 승격시키는 행정개편을 단행한다. ˝도˝로의 승격이란 여러모로 좋은 일일 것으로 들린다. 인민위원회는 찬성했을까?
열렬히 반대했다.(...) 미군정이 섬을 독립된 도로 만들려고 한 것은 그래야 보수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 인민위원회를 축출하기 위한 새로운 행정체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 승격되어야 도 수준에 맞게 경찰병력을 증강시킬 수 있고 독립된 조선경비대(당시의 군대를 일컬은 말. 당시 우리나라는 독립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군˝을 둘 수 없었다.) 1개 연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 214쪽
당시 우리나라사람으로서 경찰의 총대빵이었던 미군정 경부부장 조병옥이, 1947년 3월 14일 제주도에 온다. 우리는 조병옥하면 민주당 대선후보로서 이승만과 대립하다가 4.19직전에 미국 워싱턴 D.C의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서 애석하게 사망한 사람으로만 생각하여 그의 야당적 삶의 일면만을 부각시키기 쉽다. (...) 그가 귀국한 후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그의 강점기 활동은 별 하자가 없다.
흥사단, 수양동우회,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지원활동을 하면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해방 후 그의 행보는 해석하기 어려운 체제지향의 사악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경찰통수권자로서 친일파 경찰을 대거 다시 기용하는 것을 애국의 길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이승만, 장택상과 더불어 극우반공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미군정의 권익을 보호하는 주구 노릇을 기쁘게 했다. - 221쪽
조병옥은 총파업을 경기고 응원경찰 99명을 새롭게 동원하여 강경히 대응, 분쇄해 나간다. 그리고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고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항변하고, 북조선과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쌩거짓말로 포장하면서,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규정한다. - 222쪽
북한에서 쌩피 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서북지방 사람들이었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 사람들의 집결지였다. 기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조직으로부터 발전하였다.(...) 서북 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민당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김구가 서북청년단을 적극 지원한 것만 보아도 김구의 정치적 이념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김구도 서북사람이고 반공과 우익적 신념에 투철했다. 김구를 쏘아 죽인 안두희야말로 평안북도 용천사람으로 열렬한 서북청년단의 핵심멤버였다. - 229쪽
김익렬 중령은 다음날로 9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된다. 후임으로 박진경(1920~1948)중령이라는 문제아가 뒤를 잇는다. 그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 237쪽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박진경 대령은 이승만에 의하여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박진경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육군장 제 1호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952년 11월 7일 30만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명의로 박대령 순직충혼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인 남해군에도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1990년)
빨치산토벌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환 장군영웅으로서 숭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에 4.3공원이 만들어진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더 의미 있는 사건은 박진경 추모비와 같은 악업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다. 그의 가족이 얼마든지 추모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제주도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단기 4281년 6월 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는 비문을 30만 도민의 이름을 도용하여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기리 전한다˝할수 있는가! - 243쪽
한마디만 더 이야기하겠다. 우리나라 경찰의 날이 ˝10월 21일˝로 되어 있다. 이날 미군정청 경무국 경무과장 자리에 조병옥이 취임했다. 과연 조병옥이 대한민국 경찰의 시조가 되어야 할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애국안민을 내세우는 김구가 취임한 1919년 8월 12일이야말로 경찰의 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244쪽
제5장 여순민중항쟁
사실 내가 이 원고를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여순민중항쟁을 널리 알려서 ˝여순민중항쟁특별법˝를 국회에 통과시킴으로써 여순민중항쟁으로 당한 사람들을 신원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이 100만부라도 팔려서 사회적 여론을 이끌고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제현들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지사라고 한다면 단 10권이라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 의식에 던져지는 방할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는 깨달음을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 272쪽
박진경 암살사건은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을 불러일으켰고, 숙군작업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신임 국방장관에 취임한 철기 이범석(1900~1972. 독립운동가이며 대한광복군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해방 후 그의 행적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철저한 앞잡이로서 우파적 만행을 끊임없이 저질렀다.)은 이승만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숙군을 전개한다. - 279쪽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 봉기의 주요원인이었으며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끼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 294쪽
11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는 다음과 같다.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할 것˝
일국의 대통령이 자국의 국민을 어린아이까지라도 불순분자는 다 잡아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 303쪽
이승만은 그 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을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더 크게 말하면 그는 6.25전쟁의 최대 수혜자였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할 길이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태극기부대가 준동하는 우익친미기독교국가가 될 길이 없었다. - 304쪽
붓을 멈추려니 여순민중항쟁을 당지에서 체험한 여수읍민 한 사람이 남겨놓은 애절한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184시간의 공화국의 꿈이 드디어 완전히 깨어졌다. 학생이면 남학생이거나 여학생이거나 총살의 대상이 되었다. 집집마다 사람들은 모주리 손을 들고 나와야 했다. 그 중에서 15세 이상45세 이하는 반란군에 가담한 여부를 조사받기 위하여 국민학교 마당으로 수용되었다. 남국이라고는 하나 시월도 이미 기울어 찬서리가 사정없이 내리는 밤, 꿇어앉은 알무릎 밑에 모래알이 아프게 상안되면서 사람들은 일헤반(7과1/2)동안의 서글픈 꿈에서 깨어, 경각을 모를 위태로운 자기 생명을 조마조마 어루만지는 것이었다.(민주일보 1948년 11월3일~5일) - 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