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에 대한 흠모,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롭고 고달픈 심정을 한시로 읊었는데 후에 세인들이 이를 풀이하여 부른 것이 정선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정선아리랑은 최소한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는 모든 아리랑의 프로토타입으로 간주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떨치고 청려를 의지하여 지향없이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 달라......˝ 이러한 서정적 가사가 조선왕조 혁명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정서를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고 있는가? - 78쪽


KBS제주, ˝도올 김용옥, 제주4.3을 말하다 3부작˝은 이미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고 현재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강연이 되었고...(후략) - 92쪽


˝선생님, 워듸 제주만 70년이간듸요. 진짜 70년은 여순이라니깐요. 제주도는 대륙에서 격절되어 사람이 잘 몰랐지 않습니까? 제주4.3이 오늘날 제주4.3이 된 것은 오로지 여순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4.3은 특별법이 이미 통과되었고 대통령의 사과도 받았지만, 그보다도 단기간에 더 악랄하게 처참히 당한 여순 사람들은 아직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살아요.
선생님이 아니면 안됩니다. 제주를 해주시기로 하셨다니까 이참에 여수에 꼭 한번 내려오셔야지요.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되어 70년 말 못한 한의 해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아니면 공론화가 이루어지기가 힘듭니다.˝ - 93쪽


나는 약 두달 동안 여순사건과 제주4.3에 관해 집중적인 연구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나의 연구가 전문가들의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계의 권위있는 학자들과 토론을 했다.
제주4.3과 관련해서는 박찬식 박사, 그리고 여순 관련해서는 주철희 박사와 토론했고, 그 분들의 도움을 엄청 받았다.(.... 대표적인 2권의 책은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1948, 여순항쟁의 역사˝, 박찬식˝제주4.3과 제주역사˝)(.....)
둘다 중립적인(가치규정이 빠져있는) ˝사건˝으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제주4.3이든 여순사건이든 반드시 ˝민중항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자들의 입에서 스스로 4.3민중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면 나의 기술은 성공한 것이다.-100쪽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에는 추석이 없다. ˝떼제사˝로 곡하면서 지낼 뿐이다. 그것도 70년간!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대다수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여순민중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밤부터 시작하여 10월 27일, 그러니까 8일만에 여수시가 불타면서 진압되었으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지리산 등지로 피신하여 저항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공비˝니 ˝빨갱이˝니 ˝빨치산˝이니 ˝반란군˝이니 하는말로 불렀다. 따라서 지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큰 산아래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80살 생일기념으로 지리산입산금지령이 해제될때까지 쌩피를 보고 살아야만 했다. 낮에는 토벌군의 총에 죽고, 밤에는 산사람의 위협에 시달리고.... - 106쪽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정권의 종료를 실현시킨 4.19혁명의 몇몇 장면들을 잠깐 생각해보자!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성난 파도와 같이 경무대로 몰려갔다. 발포!(....) 중요한 포인트는 4.19하면 우리는 대학생들이 일으킨 혁명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데, 대학생들은 오히려 늦게 참여했다. 마산,대구로부터 혁명을 주도한 것은 중,고등학교학생들이었다. 서울에서도 중,고등학생들이 먼저 나왔고 대학생들의 주저를 비판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은 최전선에 선 가장 용감한 사나이들은 서울시내 시가 곳곳의 주요 코너를 지키고 있었던 신문팔이, 구두닦이, 껌팔이, 성냥팔이, 넝마주이 같은 시민의 삶에서 일상적 의식의 커텐에 가려져 있던 최하층의 무학자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 109쪽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도올이 현대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총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지금까지 1,2장은 제주4.3민중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치규정을 제대로 매듭짓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고 파악하는 관점을 논하였고, 그가 동양철학과 서양의 예수에 매진하고 있을 때 즈음 어떻게 현대사에 발을 디디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밝힌다.
앞으로 이어지는 제3장은 이 두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해방정국을 파악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제주4.3민중항쟁은 현기영의 순이삼촌, 설민석의 강의, 영화 <지슬>, 직접 제주를 가서 관련 유적지를 체험하는 등 다양하게 접해왔지만 솔직히 여순민중항쟁은 나뿐만 아니라 실제 여수와 순천에 사는 토박이들도 ˝반란˝이라는 용어를 가슴에 얹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연좌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뭔가를 규정하기에는 칼같이 매서운 이념의 잣대앞에서 두려웠을 것이고, 규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온갖 방해와 탄압에 넉다운 됐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도올은 결심했을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로마서 강해니 마가복음 강해니 등으로 예수의 근원과 본질을 규명하여 서양의 거대한 사상의 축을 뼛속까지 탐구하려고 하던 차에 이러한 제의가 들어왔으니 도올의 입장에서는 말그대로 사면초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창조적이고˝,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가야 되는 것이 도올의 숙명이었을게다.
그의 숙명이 지금의 나를, 우리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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