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지성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사람, 다시 말해 주어진 사회를 가장 답답한 구속으로 느꼈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니체(1844-1900, 독일)라는 철학자를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갇혀 있지만 갇혀 있는 줄 모르는 이웃들, 혹은 갇힌 줄 알지만 그것에 익숙해진 이웃들의 정신을 깨우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철학자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우상의 황혼>에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방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 21쪽
우리를 답답하게 구속하는 담벼락을 파괴하는 방법은 무엇을까?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 364~369쪽
니체는 영원불멸의 세계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 기독교에서는 살아 있을 때 가난과 억압을 참으라고 한다. 그러면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기꺼이 감내하라고 가르친다. 언젠가 진학하거나 취업하면 고통의 댓가로 뿌듯한 성취감이 찾아 올테니까 말이다. 직장에서는 상사나 거래처 사람에게 비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승진하거나 혹은 거래가 성사되는 단맛을 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순간의 고통과 비굴은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지만 이 순간만 참고 견디면 된다. 바로 여기 이 순간은 미래의 행복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버려도 될 수단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이런 통념에 브레이크를 건다. 영원회귀의 가르침에 따르면 굴욕과 비겁으로 점철된 고통의 순간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10만년 주기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철학이 필요한 시간 24쪽
내가 지금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했다면, 이 기억은 사라진 채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나 영원히 반복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 순간의 마음은 나밖에 알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음의 정체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속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나오는 문장처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조용하네.허락없이 들어가도 괜찮으려나?"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72쪽
그 마음속에 무엇을 담을지는 우리의 선택이지만 우린 대체로 통념을 구겨넣는다.
마음속에 있는 결정의 최종 목격자는 우리 마음뿐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 마음속은 엿볼수가 없는 것이다.
그 구겨 넣은 통념이 모략에 의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면, 아니 거창한 '모략'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잊을 수 없는 흑역사였다면 목격자는 내 평생을 따라다닌다.
니체는 지금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실행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10만년 전에도 반복되었고, 그리고 10만년 뒤에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만을 이야기한다. 먼 시간을 예로 드니 와닿지 않는가.
오늘 하고 있는 이 일들이 과거의 반복이며, 또 미래에 반복될 일로 이야기한다면 어떤가?
지금 이 순간조차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들뢰즈(1925~1995)는 영원회귀로 응축되는 니체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윤리적 강령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中
니체가 태어나기 300년 전에 유대교에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개체에 내재하는 신적 생명력을 "코나투스"라 불렀고,
동시대에 살았던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도 인내천(人乃天), 바로 사람 자체가 하늘이라는 혁명성을 띠며
한울님, 즉 천주라고 불렀다.
이처럼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최시형같이 자유를 꿈꾸며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담벼락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견고한 담벼락의 실체를 자신을 희생시키며까지 설파한 이유로 역사에 남았다.
지금 영원회귀에 대해 내가 얻고자 하는 방향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영원회귀의 개념은 이렇게 딱 부러지게 단정짓기 어려운 개념이고, 더군다나 당대의 철학자들을 곤혹하게 만든 신비로운 사상이기도 하다.
난 철학에서 어떤 길을 찾고자 하는 건 아니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정해진 길을 걷는다고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보장이 없듯이 말이다. 오히려 찾기 힘든 길 위에 내던져져 불편한 행보를 거듭하며 헤메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영원회귀가 등장한다.
"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9쪽
영원회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한없이 무겁기도 가볍기도 한 개념이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존재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인 지구라는 관점에서 볼땐 한없이 가벼운 존재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짐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다.
이 오묘한 저울사이에서 쿤데라는 영원회귀가 지배하는 세상은 무기력하다고 비판한다.
전쟁이든, 죽음이든, 독재든 어차피 반복될 일이라면 개선이나, 진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쿤데라의 말은 일리있다. 그리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 인류는 안주와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마침내 진보를 일구어낸다. 고개가 끄덕여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린 이 영원한 회귀의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원한 회귀의 개념을 전제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쿤데라의 말은 마치 무한 경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슬로건으로 인간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몰아넣는 신자유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영원회귀의 니힐리즘과 무기력을 극복하자는 말이 반드시 진보를 일궈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방향과 다소 다르다는 점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영원회귀의 속뜻을 아래와 같이 다룬다면 어떨까?
야스퍼스로부터 인류최고의 이론가라는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영민했던 철학자로 공(空)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한 인물인 나가르주나의 <중론>에 나오는 말이다.
" 만약 모든 존재를 자성(自性)을 가진 실체로 본다면 그대는 그 존재가 인연이 없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하나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중론 중에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 -58쪽
"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 - <철학이 필요한 시간> 62쪽
내 삶을 당당하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영원회귀라는 허무맹랑함에서 나온들 어쩌랴
중요한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을 소중히 하면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