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독자 대부분은 내용에 대해 인문학적 사유를 펼치면서 감동을 주는 요인(상징)들을 찾느라 깊은 상념에 잠긴다.
용케 그런 장면을 찾으면 감탄사를 외치며 칭찬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없으면 멀뚱해져서 뭐 이런 것을 작품이라고 하냐며 혀를 차게 된다. 그러나 빌려 쓰는 언어로 문학이 만들어진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낱말(기호)들에서 내용을 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전 시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같은 낱말들로 이야기들을 수없이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또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로브그리예나 한트케 말대로 ˝낡아 버렸고˝ ˝ 서술 불능˝ 이며 ˝무미건조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한트케는 그래서 관객모독의 서술방법에 대해 <나는 상아탑에 산다>라는 소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희곡들의 작법은 (.....) 연극 진행을 단어들로만 한정한 것이었다. 단어들의 서로 다른 의미는 사건 진행이나 개별이야기를 방해했다. 연극이 어떤 구체적인 상을 그리지도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하지도 않으며,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구성된다는 점, 그것이 이 작법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에 대한 거부가 내 첫 희곡의 작법이었다˝ -75쪽








페터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태생 독일 작가이다.
1942년생으로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작가 중 생존해 계시는 몇 안되는 작가이다.
<소망없는 불행><페널티킥앞에선골키퍼의불안>이 책장에서 유혹했지만 꼭 이 작품부터 읽고 싶었다.
제목처럼 관객을 모독하는 작품이다.
무슨 얘기냐하면 연극공연을 하기 위한 희곡작품인데, 등장인물이나 대사가 없다.
대신 끝없이 늘어놓는 언어유희 모음이다.
마치 이상의 단편집 중 <지도의 암실>에서 아무리 꼼꼼하게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식?
마지막엔 책의 3장 분량의 욕설 모음을 내뱉는다.
다행히도 초연은 성공리에 환영받았지만 말이다.






작품해설에 나온 이 작품의 배경은 이렇다.
작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서독 문인들이 독일의 전쟁 범죄 행위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조금도 속이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겠다는 공감대 속에서 만든 문인단체 47그룹 모임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의 문학은 ‘신사실주의문학‘ 또는 ‘참여문학‘이라고 불린다)
당시 그 모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과 귄터 그라스도 47그룹 문학상을 받고 참석하였다.
요즘 읽고 있는 양철북의 작가이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가 세살 생일에 ‘어른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하는 비현실적인 서술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겠다‘는 47 그룹의 문학방향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사의 배려덕에 모임에 참여한 이름도 생소한 한트케가 그 기라성 같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에게 ˝서술 불능이 독일 문학을 지배하고 있˝고 그들의 문학은 ˝무미건조하고 어리석으며˝ ˝ 낡은 서술 문학에서 성장한 것˝이라고 맹공을 펼쳤던 것이다. - 70쪽









한트케는 알랭 로브그리예(질투를 쓴 작가)가 자신이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데 대단히 중요한 모범이었다고 한다.
로브그리예는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의 언어이론, 롤랑바르트 같은 프랑스 구조주의자 등에 입각해 작품을 썼던 ‘누보로망‘의 대표작가이다.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언어를, 사회 안에서 긴 시간을 두고 축적된 언어(langue, 랑그)와 그 일부를 빌려 쓰는 개인들의 언어(parole, 파롤)로 구분하고, 진정한 언어 연구의 대상은 랑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언어가 세상 사물과 아무 관계 없는 기호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낱말이 그 지시 대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낱말이란 세상 사물과 아무런 관련없는 기호일 뿐이며 기호와 그 의미 관계는 단지 사람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의식을 요구했다. 한트케가 젊은 날 심취했던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이러한 이론에 기반을 둔 사조다.)
한트케는 새로운 소설을 위한 논리와 문학적 시도를 자신의 논리로 전환시켰다

‘나는 독일어권에서 프랑스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일한 작가였다‘라고 말한다.

언어이론,형식주의, 구조주의 등과 같은 외국 사조의 영향을 통해 형성된 그의 문학 이론은 당시 서독 문단을 주도하던 47그룹의 문학 이론과 그 토양이 전혀 달랐다. 글을 쓸때 한트케의 과심은 오직 언어에 있는 데 반해 47그룹 작가들이 열중한 것은 오로지 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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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은 관객뿐만 아니라 이 희곡이라 할 수 없는 희곡을 읽는 독자까지 모독한다.
모독받고 싶으면 한번 읽어보시라.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 하지만 그 모독의 크기는 60여페이지정도의 얇디 얇은 분량 덕분에 참을만하다.
사실 프랑스 구조주의라는 사조에 대해 정말 1도 몰랐다면 이 무슨...잡소리를...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이런 독자들의 반응을 간파했는지 작품해설에서 비트겐슈타인, 소쉬르를 출동시키며 어르고 달랜다.
그러면서 고매한 지적 허영심을 불어넣어 평정심을 갖추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든지, <대머리여가수>는 그나마 희곡의 형식이나 갖추고 말장난을 하는데,
이건 뭐 아무것도 없다..그냥 단어와 문장들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아..재미없다. 재미없다.



그런데 말이다....
뭔가가 내 뒤통수를 탁 쳤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소쉬르의 주장. 뭐 그들의 저서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비트겐슈타인은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한 신해철님이 만든 그룹명으로 잘 알지)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안다.
그리고 ˝우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라든지, ˝언어는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이 무엇을 지향했는지 어렴풋이 느낀다.

바로 내가 느끼는 그 어렴풋한 언어학(?)을..
이 작품이 집요하게 ˝바로 이거야. 바로 이거야. 이 바보야 ˝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반드시 스토리가 있고,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것만이
문학(예술)은 아니다˝ 라는 사고의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문학을 읽다보면, 얼척없이 재미없는, 단조로운, 책들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이 책은 그런 책들도 단숨에 내치지 않고 이건 필시 그 당시의 어떤 사조나 시대적 흐름에, 또는 주도하는 특이한 작가나 문체에 영향받은거라고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너그러운 시선을 선물했다.

한트케야 재미는 없지만 7천원 밥값 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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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16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프리쿠키님께서 아이와 함께 하는 열악한(?)독서 환경에서 이런 어려운 책을 읽으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저는 아이랑 놀 때는 그냥 내려놓는답니다ㅜㅜ

북프리쿠키 2018-09-18 15:07   좋아요 1 | URL

초가을 볕에 야외에서 읽으니 기분좋네요.
아이랑 놀 때는 책 자체를 들고 가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ㅎㅎ
훌쩍 커버리기 전에 아이랑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에는 책이랑 휴대폰은 가급적 안 들다봐야겠습니다..^^;

꼬마요정 2018-09-16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질투> 읽다가 식겁해서 이런 어려운 책은 좀 더 내공이 쌓이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평생 못 읽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읽을 거리는 어마무시하게 많으니까요^^

아이와 새, 아이스커피, 따뜻한 라떼, 그리고 물. 너무 멋진 풍경입니다. ㅎㅎ

북프리쿠키 2018-09-20 20:59   좋아요 0 | URL
아~질투 2장 읽다가 살포시 덮어놨는데요ㅎㅎ 컨디션 좋을때 아니면 열어보기 무서운 책이네요ㅋ
꼬마요정님 내공에 어려운 책이 있을까요.ㅎ

딸애와 함께하는 이 소박한 시간이 참 좋으네요^^

cyrus 2018-09-17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트케가 쓴 책은 대부분 분량이 얇아요. 그런데 내용은 재미없어요.. ㅎㅎㅎ

북프리쿠키 2018-09-20 21:0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소망없는 불행>읽어볼려고 펼쳐봤는데 2편의 단편이더라구요.
또 도전해봐야겠어요
읽다보면 좋아지려나~ ㅎ

카알벨루치 2018-09-17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지가 납니다 딸과 책과 라떼 거기다가 비둘기...이건 이 글을 읽는 나를 포함한 알라디너를 모독하는거 아닙니까 독서하는 장소도 완전 우아 간지 엄지척!!!!ㅋ

북프리쿠키 2018-09-20 21:03   좋아요 1 | URL
오랫만에 광합성 중입니다.
여긴 딸애가 금붕어랑 비둘기 먹이 주는 곳인데.
책 읽기에는 집~쭝이 ㅎㅎ

연국현 2019-10-1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의 건덕지를 찾아볼 수 없는 책이라 서평을 보고 안읽기로 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