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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진주만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미국의 막강한 군수산업 덕분에 재빨리 피해를 복구하고 강력한 함대를 재구성하여 일본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과 같은 대규모의 공격을 사전에 예방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은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실 당시 미군은 진주만 공습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엄청난 정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장치가 없었다는 점이 미국이 정보를 입수하고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이렇게 정보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과, 미국을 지도하는 대통령이 세상의 여러가지 정보를 취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여야 했다. 초기에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시적으로 OSS를 운영했었다. 이 조직이 사실상 미국 CIA의 전신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정보를 다루는 기관을 군대의 휘하가 아니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따로 존재를 시킨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국가가 국민의 정보를 관리한다는 것, 그것도 정식 계통을 밟지 않고 특수한 조직을 따로 운영한다는 것은 민주국가로서는 정체성에 훼손이 가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부담감을 덜어준 기회가 바로 소련과의 대치로 인한 냉전국면에 돌입한 것이었다. 냉전은 말 그대로 전쟁은 아니지만 전쟁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서로 상대방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더 많은 일들을 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한 정보의 수집만이 아니라, 자국에 이익이 가는 일을 비밀리에 행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행위가 CIA에 주어졌다. 눈 앞에 거대한 적의 위협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 앞에선, 이젠 더 이상 민주주의의 이념을 훼손시킨다는 것을 이유로 정보행위를 막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첫 시발은 베를린 봉쇄였다. 독일을 분할해서 점령한 연합국의 양 당사국인 미국과 소련은 소련이 점령한 지역안에 존재하는 수도 베를린은 분할해서 점령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문제는 베를린까지 연결되는 통로였다. 소련이 그 통로를 막아버리자 베를린은 소련의 점령지 안에 존재하는 섬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미국이 소련을 경계해온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직접 소련과의 대치로 들어간 것은 바로 베를린 봉쇄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CIA의 활약이 눈부시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CIA는 그 후 여러가지 국면마다에서 때로는 알려진 상태로, 때로는 잊혀진 존재로 큰 힘을 발휘했다. 한국전쟁에서도 CIA는 큰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일본에 대한 접근이었다. 피점령국인 일본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본을 동맹국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지만, 서로 엄청난 피를 흘린 거대한 전쟁이 끝난 직후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일을 해낸 존재가 바로 이 CIA였던 것이다.
그 이후의 CIA의 역할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흔히 아는 것들이 많다. 베트남전에서의 역할, 중남미의 반군들에 대한 역할, 중동에서의 역할들,,, 그리고 CIA는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또 자유와 민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거짓과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는 시점에서 민주세계를 리더하는 국가에서 과연 이런 조직이 없이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토록 많은 해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라는 것은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정의만을 행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관이 적절한 제한을 받지 않고 운영된다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후버국장과 관련한 권력남용에 관한 일화들은 이러한 당위성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또 CIA가 자유를 지키고 국익을 수호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과연 그 목적에 합당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이 방대한 내용을 망라한 책이 웅변적으로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그 어느때보다도 정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세상이다. 국가가 아니라 일개 기업의 경우에도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기업의 사활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정보는 필요하다. 일개 기업에서도 정보가 그토록 중요한데, 하물며 수많은 국민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현대국가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보는 힘이라는 점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주는 미덕이다. 정보라는 장벽의 뒤쪽에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반인들이 알기어려운 일들, 그런 이들이 국민을 기만하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보는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평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언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론마저도 자본의 논리에 종속당하는 현실에서 이 책을 펴낸 작가와 같이 오랜기간동안의 노력을 기울여서 이토록 세세하게 문제를 파헤쳐 그동안 우리에게서 동떨어져 있던 진실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는 일을 하는 것의 중요성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풍문으로만 돌던,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중요한 일들의 진실에 대해서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