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지트 인 서울 Agit in Seoul - 컬처·아트·트렌드·피플이 만드는 거리 컬렉션 ㅣ in Seoul 시리즈
민은실 외 지음, 백경호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지트' 그 단어의 어원은 사실 잘 모른다. 그러나 아지트라는 말은 왠지 불온한 느낌이 느껴지는 말 같다. 그 옛날 머리에 빨간 뿔을 두르고 다니던 공산주의자들이 잘 사용하던 말이 아닌가! 남에게 잘 알려지지 않게 꼭 꼭 숨겨두고 자신들만이 사용하던 비밀스럽던 장소! 아지트는 그래서 비밀스럽고, 은근하고, 잘 알려지지 않고, 그곳을 아는 사람들만이 찾는, 그래서 컬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방도시에서 문화의 중심지라고들 불리는 서울로 쳐들어온지 어언 20여년. 한때 나에게 서울은 끝없는 문화적 자양분을 공급해주던 도시였다. 서울의 거대함과 익명성은 아무리 길을 걷고 또 걸어도 서울을 다 알 수 없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무게로 느껴졌고, 아직 젊던 시절 나는 그 큰 도시를 정탐하고 나의 비밀 지도에 그려 넣는 것에 큰 탐험의 의미를 느꼈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어수룩하던 직장 초년생시절. 나의 주말은 온전히 서울탐험에 바쳐졌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면 지난 주말 정탐했던 서울의 거리들을 지도에서 확인하고, 주요 사항들을 메모하고, 거리에서 얻은 예술관련 팜플렛을 고이 스크랩하면서 보내던 그 귀중하던 시간들, 지금도 내 책장에는 그때 모았던 귀중한 문화헌팅의 결과물들이 몇개의 스크랩북을 채우면서 고이 꽃혀져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이었던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모든 골목들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다 멋있어보였다. 서울지엔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며, 그들이 보는 영화를 보고, 그들이 읽는 책을 읽고, 그들이 않는 카페에 않아서 그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관찰하여 보았다. 그렇게 하기를 수년. 어느듯 나자신도 서울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문득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들이 서울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너무 빈약한 것에 놀라고, 내가 그토록 의미를 부여했던 서울의 건물과 골목과 문화들에 대해서 너무나 덤덤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놀라곤 했다. 의미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볼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 자신도 차츰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신비롭던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는 어느듯 나 자신에게도 일상이 되어버렸고, 그 옛날 내가 신기하게 생각했던 서울사람들의 무관심이 이젠 나에게도 전염이 되듯하다. 어느듯 나의 서가에는 유럽과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관한 책들로 가득차버렸다. 나에게 이국적인 것이란 이젠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되었다.
정말 서울은 이제 더 이상 탐험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아지트라고 부를만한 소중한 의미부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몇해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나는 대상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면, 대상의 모습과 이미지와 의미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일하 대상이라도 약간의 각도와 노출. 축약과 생략. 햇빛의 강도에 따라서 그 사물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곤 했었다.
이 책 아지트 인 서울은 나에게 젊은 시절의 감성을 다시 일꺠워준 책들이다. 사실 나는 그시절 참 부지런히도 서울을 훝고 다녔고, 이 책이 소개하는 길들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 물론 거리의 모습과 그곳에 들어선 문화공간들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이 책이 나에게 의미로운 것은 그런 새롱운 정보의 업데이트가 아니라, 내가 무감각해졌던 서울이라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준 것이다. 이젠 나도 가까운 곳, 더 이상 탐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묵은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옛날 서울사람들에 대해 내가 느끼던 그 답답한 느낌을 나 스스로가 풍기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