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이럴 줄 알았다."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소리일까요? 전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가 한국에서 별 반응이 없었다면 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가 출판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읽었던 <웃지마>와 <인간 동물원>에서 '참을 수 없이 시대착오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은 주제에, 글솜씨마저 형편없는' 면모를 막장까지 봤었으니까요. 이 사람의 소설이 정공법으로는 절대 팔릴 리가 없다는 게 결론이었죠.
 
물론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는 여전히 글솜씨가 형편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웃지마>나 <인간 동물원>보다 조금 더 나은 편이긴 해도, 별 2개 이상이 아깝기는 마찬가지예요. 묘사는 박물관에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상투적 표현"이라고 전시해두고 싶을 만큼 상투적이고, 대사는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틀림없는 수준 이하에다가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로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특히 118p는 단연 최고로 꼽을 만해요.

...가즈오는 한동안 난처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가즈코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결심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말해버린다. 가즈코, 난 네가 좋아졌어."
  "어머!"
  가즈코는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얘는, 조숙한 아이구나!'
                                                                             -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 118p

 
뭐, 이것만 가지고 폭소를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전후 맥락을 알고 있다면 실신감 수준인 대사예요. 사실 이렇게 호들갑 떨 것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대사들도 모조리 이렇게 현실감이 부재할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죠. 일본 출판계가 예전부터 상업화에 굉장히 능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 본래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야 마땅하지만, 전 이런 소설가가 어떻게 해서 이즈미 쿄카 문학상, 타니자키 준이치로상, 카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을 휩쓸었는지 쉬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간신히 '취향 차이'를 감안해서 살짝 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SF 소설을 표방한 주제에 과학적 논거가 굉장히 희박하다는 점에서는 도무지 관대해질 수 없더군요. 제가 <나는 전설이다>가 기대에 못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별 두 개 반 밑으로 줄 수 없었던 까닭은, SF답게 - 솔직히 SF를 많이 못 읽은 제가 이런 표현을 쓸 자격이 있느냐 역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되려 이런 초보 독자마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츠츠이 야스타카가 안이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습니다. - 작가적 상상의 영역에 충분한 과학적 논거를 끌어들여 설명했기 때문이에요. 네, 최소한 <나는 전설이다>에는 풍부한 상상력과 고개를 끄덕일만한 과학적 논거가 있었으니, SF라는 장르에는 굉장히 충실했던 거죠. 제가 이 소설이 싫든 좋든, 이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반면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에 수록된 소설들 중에서 SF를 표방한 두 편, 즉 표제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The other world'에서는 (전세계에 산재한 유치원생들에겐 몹시 굴욕적인 표현이지만) 유치원생조차도 할 수 있는 망상과 희박한 과학적 논거가 설득력 없이 결합된 게 고작입니다. 더 거칠게 말해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SF 소설에서 '과학'을 기대하신다면 차라리 고등학교 과학책을 한 번 더 읽어보시길 권하겠습니다. 아무리 평범한 과학 '교과서'에서라도, 최소한 츠츠이 야스타카의 SF 소설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상상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장르라는 게 거의 없어보이긴 합니다만, 그나마 호러 쪽에 가까워 보이는 '악몽'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예요. <웃지마>와 <인간 동물원>에서 유감없이 선보였던 이 사람의 질낮고 깊이 없는 심리학이 다시 한 번 펼쳐집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곧장 히스테리라고 못박고, 싸이월드나 블로그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는 '믿든 말든 정신분석학'으로 페이지를 때우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밤에 오줌 지리는 남자애 고추 떼어가겠다고 가위를 들고 있는 귀신이나, 복도를 굴러다니는 중년의 모가지 역시 매력 없긴 마찬가지고요. 네, 이런 걸 읽으려면 차라리 앞에서 언급한 믿든 말든 정신분석학 포스트나, 꼬꼬마 시절에 즐겨 읽던 <공포특급>을 선택하는 쪽이 효율적인 면은 물론이요, 정신 건강에도 더 좋습니다. 

*뱀다리* 
 
애니메이션이 훌륭한 건 순전히 애니메이션 고유의 장점이에요. 설정을 원작에서 빌려왔다는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하게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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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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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네버랜드>를 읽고 투덜대다가가 글 마지막에 와서 "참 다행스러운 건, <네버랜드>는 2000년 작이고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2004년 작이란 겁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인 게죠." 라며 자기 위안 삼아 덧붙인 적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작가의 필력이란, 날이 갈수록 훌륭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명 저런 식으로 섣불리 일반화시킬 수 있는 현상은 아니죠. 저 말대로라면 <황혼녘 백합의 뼈> 역시 2004년 작이니, 최소한 <네버랜드>보다는 더 대단해야 마땅하잖아요. 제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그래도 온다 리쿠가 장르에 빠삭한 사람이라는 건 여전히 인정합니다. 다만, 그 결과가 <굽이치는 강가에서>처럼 좋을 수도 있고, <황혼녘 백합의 뼈>처럼 나쁠 수도 있는 거죠.
 
기본적인 설정과 도입부는 나쁘지 않아요. 부모보다 더 가까웠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미즈노 리세 앞에 던져진 수수께끼 같은 유언. 여기에 할머니를 죽일만한 이유가 충분했던 두 고모 -  리나코, 리야코 자매 - 와 리세 사이의 미묘한 알력 다툼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할머니 대신 리세의 뒤를 봐주고 있는 리나코가 요조숙녀인지, 아니면 냉철한 독살마인지 쉽사리 알려 주지 않을 뿐더러, 몇 번에 걸쳐 독자의 판단이 뒤집힐만한 장치를 구사하기 때문에 좀처럼 긴장의 끈을 놓기가 힘들 겁니다. 물론, 온다 리쿠 소설이 늘 그렇듯, 새롭게 소개되는 캐릭터들의 비주얼은 여전히 막강해요. 팬들은 전작에서 중학생이었던 미즈노 리세가 어느 새 고등학생이 된 모습만으로도 즐겁고요.
 
그러나 제각각 맡은 바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던 장르들이 결말부에 와서는 제자리를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결말 전까지만 해도 훌륭히 제 역할을 해 주고 있던 리나코의 복잡한 이미지를 마지막에 와서 다시 한 번 뒤집은 건 지나친 욕심이었어요. 덕택에, "어둠의 세계가 얼마나 비열하고 잔혹한지 느껴보라"는 식의 몹시 갑작스럽고 진부한 느와르적 결말은, <황혼녘 백합의 뼈>에서 장르적 장치가 이야기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되려 이야기 전체가 장르적 장치의 다양함을 뽐내는 데 봉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게 만들더군요. 조금 더 불평을 하자면, 이 역시 <식스센스> 이후 미스터리물을 휩쓴 반전 강박증의 연장선상이라 봐도 심하진 않을 거예요.
 
또 고등학생이 된 미즈노 리세는 전작에 비해 꽤나 심심합니다. 전작에서 온다 리쿠가 리세의 (어두운) 정체성을 너무 확고하게 굳혀 놓으며 마무리 지은 게 문제가 아니었나 해요. 지나치게 고민하는 캐릭터는 짜증나지만, 그렇다고 별 내적 갈등 없는 캐릭터는 더더욱 매력 없어요.
 
*뱀다리*
 
1. 앞에서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황혼녘 백합의 뼈>보다 낫다고 한 건, '장치가 이야기에 봉사하느냐', 아니면 되려 '이야기가 장치에 봉사하느냐'의 차이 때문이었어요.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황혼녘 백합의 뼈>보다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유기적으로 작동하거든요.
 
2. 83p 여덟 번째 줄, '리나코가 칭찬과 질투를 섞어 말하며~"로 시작되는 문장에서 '리나코'는 명백한 오역(아니면 오타)입니다. 문맥상 '리야코'가 옳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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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9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shaGreen 2010-02-1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 감동(!)했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들었던 묘한 불편함의 정체를 그야말로 시원하게 콕 긁어주신 리뷰라서.. 반전에 대한 압박감이라든가, 장치를 위해 봉사하는 이야기라는 지적이 와 닿는군요.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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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본격 추리에서 범인을 미리 맞춘다면 그 또한 굉장히 즐거운 일인 줄 알았더니만, 서술 트릭의 원조이자 최고봉이라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결국 그 소원이 실현되니, 막상 즐거운 일이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몹시 슬픈 일이었다. 본격 추리를 읽는 즐거움이란, 그저 작가가 놓아둔 덧에 멋지게 걸려들어 끝까지 무고한 이를 범인으로 지명했다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으며, 숨이 턱 막히는 충격적인 유희를 맛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에 비하면 작가와의 두뇌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성취감 따위, 영 심심하기 짝이 없다. 최소한 본격 추리에 한해서라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더 끔찍하게 교묘한 트릭으로 '괴롭히고' 더 처절하게 '당하는', S-M적인 관계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고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일본 추리 하면 사회파를 떠올리는 내가, 신체 훼손 묘사라면 영상과 문자를 막론하고 눈을 돌리는 내가, 굳이 '(얼마나 잔혹했으면) 19세 미만 구독 불가'까지 붙은 <살육에 이르는 병>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극강의 서술 트릭으로 유린 당했다는 독자들이 만장일치 만점을 연호하는데 도저히 읽지 않고서 배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정말이지 재수가 없어도 유분수지, 이틀 연속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이성적으로 도무지 납득하기가 힘들다.
(이제부터 결정적 스포일러가 언급되니, 이쯤에서 '무조건 이 책을 봐야겠다'는 분들은 아래 두 문단을 뛰어넘고 '(스포일러 끝)'부터 다시 읽어 주시라.)
 
 
(스포일러 시작)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미칠 듯이 연이어 터지는 칭찬의 행렬 덕택에, 어디 얼마나 대단한가 두고 보자는 심정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린 게 천추의 한이다. 하나, 서술 트릭이란 범인을 감추기 위해 특정 어휘를 기피한다. 특히 세 명의 서술자 - 히구치, 미노루(범인), 마사코-  가운데, 범인의 가족 - 마사코 - 이 한 명 껴 있으니, 특히 이 시점에서 유심히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둘, 중간부터 심심찮게 (노골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증후가 나타난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범인의 모친이라 추정됐던) 마사코의 시점에서 서술된 어휘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뜯어보니, 아아, 이럴수가, 이 여자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미노루'라 지칭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범인 미노루는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란 말인가? 설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되는 '아버지 = 아들'의 공식이 트릭으로 이용되는 건가?(물론 '상당히' 익숙한 장치, 즉 클리셰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신선하게 먹힐 수 있는 유요 기간은 지났다고 생각한다.) 극도에 이른 좌절을 겪고 쓰러질 뻔한 육신을 겨우 수습한 후, 그래도 끝까지 마저 읽기로 했다. 이 역시 독자를 이중으로 물먹이려는 작가의 두뇌에서 나온 치열한 예술적 산물일지, 누가 또 안단 말인가.
 
고지는 눈 앞에 있었다. '마지막 한 페이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는 그 대단하신 마지막 페이지님과 조우하게 될, 본래는 땀을 쥐어야 마땅할 상황이었으나, 내가 오로지 바란 바는 "범인이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미노루가 아버지만 아니게 해 주세요"뿐이었다. 그래도, 끝내, 결국 - 맞다. 맞았다. 맞아 버렸다. 범인의 역겨운 네크로필리즘적인 취미와 극악한 시체 훼손 묘사를 겨우 참아줬더니만, 돌아오는 건, 이젠 좌절을 넘어 허탈감뿐이었다.
 
 
(스포일러 끝)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평론가 가사이 기요시의 평이 황당할 정도로 웃겨 준 덕택에 정신적 붕괴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신본격이 몰사회적이란 비판을 반박하는 논리로, '<십각관의 살인>(아야츠지 유키토 저)의 비극은 대학생들의 집단 음주 중독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더라. 그러나 '몰사회적이다'라는 비판을 이토록 경직되게 해석한다면, 세상에 몰사회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어디 존재나 하느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선 <가문의 영광 시리즈>와 <두사부일체 시리즈> 역시 몰사회적인 영화가 아니다. <십각관의 살인>을 비롯해 다른 예로 든 신본격파에서 중요한 건 독자를 속이는 트릭이지, '대학생들의 집단 음주 중독사' 정도의 사소한 설정 따위는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도 작품의 품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 한다. 사실 가사이 기요시도 사회파 추리 지지자들 - 가사이 기요시의 표현에 의하면 '몽매한 평자' - 의 '몰사회적이다'라는 비판이 상대적 비교의 관점에서 나온 줄 뻔히 다 알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명색이 평론가님이시니 말이다.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내부 집단 - 가사이 기요시는 본격 추리 소설가로도 유명 - 에 대한 비판을 이런 낮은 수준에서 반박하는 모습은 단지 자격지심의 발로, 이것 말고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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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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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창조한 캐릭터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거리로 나서면 숱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이들이기 때문에 쉽사리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좋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반짝이는 일순간을 포착하여 축약되고 정제된 언어로 묘사하는 재주가 부족한 듯 싶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는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구구절절한 묘사는 되려 지독한 지루함을 유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극이 아닌 틀에 박힌 일상, 그 자체에 대한 기록 정도로 전락할 위험 또한 안고 있다. 한 인간의 일상을 그대로 비디오로 담은 영상을 영화라 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장면이 특정 의미를 지니도록 선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편집을 하는 것이고, 소설은 정제된 언어로 쓰여진다. 극에서 의미 없는 일상은 단순한 군더더기에 불과하고, 보통 비극적으로 글솜씨가 형편 없는 작가일수록 군더더기가 많다.
 
물론, 미야베 미유키에게 이따위 불만이야 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애초에 맞지도 않는 말이다. 비록 그녀는 정제된 언어를 거부할지언정, 사전에 정확한 계산을 거쳐, 시시각각 시점을 바꿔가며 다양한 서술을 즐길 줄 안다. 비록 단순한 작업에 지나지 않지만, 순서도 없이 잘게 나눠진 정보가 캐릭터 사이를 오가며 하나하나씩 던져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묘한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런 테크닉이 탁월하며, 그리고 드물게도 '떼극'에 굉장히 강한 작가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유>와 원고지 6천매 분량의 <모방범>이 압도적인 대표작으로 꼽히는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완전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단편집, <대답은 필요 없어>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혹여 기대라도 덜하면 조금 재미있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평범, 그 자체다. 여전히 살갑지만, 여섯 편 모두 순간적인 폭발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함께 산 <누군가>는 썩 두껍다. 기대하겠다. 정말, 미야베 미유키는 장편에 지독히 강하다.
 
ps. 별 두 개와 세 개를 놓고 고민하다 두 개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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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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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6. 12. 21. 오후부터 틈틈이 읽어 밤에 완독.
 
고양된 기분은 언젠가 식어버린다는 것, 그것이 순리겠지요. <밤의 피크닉>으로 포문을 열어 <삼월은 붉은 구렁을>, <굽이치는 강가에서>까지 모두 손꼽을만한 소설이었으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 이번 달에만 무려 네 편이나 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최고조까지 이른 아찔한 상태에서, 단 하루만에 평정심을 되찾는다는 전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지면에서 살짝 붕 뜬 듯한 기분에 젖어있을 땐, 단 몇 일이나마 그 어떤 추한 일에도 일말의 관용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뭐 일상의 활력소랄까, 그 정도쯤 된다 이 말이에요.
 
1년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이런 행복한 기분을 망쳐버린 건 공교롭게도 <네버랜드>랍니다. 야속한 일이지요. 온다 리쿠 때문에 뛸 듯이 기뻤다가, 당일 밤엔 철저히 무덤덤해져 버졌어요. 아까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어요. 게다가 뭔가를 믿는다는 건, 먼 훗날 맛볼 실망을 전제해 두는 거잖아요. 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썩 반갑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건 썩 와닿지 않는 표현이더군요. 사실, 기본 설정만 두고 보면 닮은 꼴을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죠. 방학, 한 곳에 모여 몇 일간 합숙하는 아이들, 그리고 감춰놓은 비밀. 어때요, 비슷한가요. 하긴, 출판사에서 몇 자 적어놓은 책 소개를 보곤 저도 감쪽같이 속았으니까요. 그러나 <네버랜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에 비해 몇 수 정도 더 떨어지면 떨어졌지, 더 훌륭하다고 할만한 미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걸요.
 
온다 리쿠는 굉장한 이야기꾼이에요. 분명 소재나 기본설정은 대충 눈으로 훑어만 봐도 결말이 대충 보일 정도로 도식적이고 통속적이긴 하지만, 그 모든 걸 극복할만한 스토리텔링과 치밀한 구성 능력이 있어요. 문장에서 짙게 배어나오는 아련하고 그리운 듯한 묘한 느낌, 그리고 독자를 취하게 하는, 아름다우면서도 탁월하고 시의적절한 표현들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온다 리쿠는 모든 독자들의 DNA구조까지 연구하면서 글을 쓰는 게 아닐까, 라는 의심까지 들곤 해요. 어느 부분에서 어떤 표현을 쓰고, 여기에선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감춰야 하며, 어디에서 비밀을 터뜨려야 하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온다 리쿠라고 생각했어요. 제 아무리 지독히 진부한 소재라도 독자를 취하게 하는 힘, 그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요.
 
그런데 <네버랜드>를 읽고 있자면 이게 과연 정말 온다 리쿠가 맞긴 하나,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요. <굽이치는 강가에서>처럼 진부한 설정을 그대로, 그러나 구성미와 스토리텔링는 떼고. 제 아무리 고수라도 차포 뗀 장기에서 승승장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한 걸지도 몰라요. 차라리 장기는 상으로 뭘 잡기나 하지, 이야기에서 구성미와 스토리텔링을 떼면 도대체 뭐가 남겠어요. 독자를 취하게 만들었던 아련한 표현이요? 글쎄, 이번엔 그쪽도 영 아닌 듯 싶어요. 다작 작가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별 고민한 흔적도 보이지 않고 물흐르 듯 심심하게 계속되는 문장은 예전과 같은 읽는 맛이 결여되어 있어요.
(작가 후기를 읽어보면, 온다 리쿠 스스로 <네버랜드>를 쓸 때 모두 다섯 편의 소설을 집필중이라 밝혔으니까 단순한 추측성 발언은 아니에요.)
 
이제 남는 건 진부한 설정뿐이죠. 미스터리 구조가 사라진 이야기는 힘을 잃고, 속속들이 밝혀지는 비밀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아요. 누가 비밀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이제는 누가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할 것 같다는 걸 이미 독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비밀이란 건, 앞에서 일말의 궁금증을 살짝 흘려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목을 옭아매듯 독자 혼자 끊임없이 상상을 넓혀가게 한 다음, 쾅하고 폭로해야 재미있는 법이에요. 이런 점층적인 폭로의 기술도 없이, 단순히 치명적으로 아름답기만 한 미소년들의 과거지사를 1,2,3,4 순서에 맞게 '친절히' 이야기해 봐야 별 거 있을 리 없죠. 미소년 네 명이 각각 고히 간직했던 비밀들 사이에 단 한 줄기의 연결고리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역시 이야기를 더욱 느슨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요.
 
이래저래 하이텐션으로 온다 리쿠에 대한 찬사를 늘어놨던 어제 이맘 때를 생각하자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스스로부터 무척 좌절스러워요. 오, 세상에, 차라리 몇 일만 늦게 읽을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온다 리쿠는 신간이 손에 들어오는 족족 읽어야 하는, '여전히'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가니까 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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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1983 2006-12-3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참...사람마다 관점과 취향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는지 신기합니다.
그리고 <네버랜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보다 1년 먼저 나온 작품인데
님의 감상대로 생각한다면, 그럼 온다 리쿠는 한층 더 발전한 작가가 되는 셈이군요.
바숫한 설정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썼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