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이럴 줄 알았다."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소리일까요? 전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가 한국에서 별 반응이 없었다면 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가 출판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읽었던 <웃지마>와 <인간 동물원>에서 '참을 수 없이 시대착오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은 주제에, 글솜씨마저 형편없는' 면모를 막장까지 봤었으니까요. 이 사람의 소설이 정공법으로는 절대 팔릴 리가 없다는 게 결론이었죠.
 
물론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는 여전히 글솜씨가 형편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웃지마>나 <인간 동물원>보다 조금 더 나은 편이긴 해도, 별 2개 이상이 아깝기는 마찬가지예요. 묘사는 박물관에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상투적 표현"이라고 전시해두고 싶을 만큼 상투적이고, 대사는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틀림없는 수준 이하에다가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로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특히 118p는 단연 최고로 꼽을 만해요.

...가즈오는 한동안 난처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가즈코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결심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말해버린다. 가즈코, 난 네가 좋아졌어."
  "어머!"
  가즈코는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얘는, 조숙한 아이구나!'
                                                                             -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 118p

 
뭐, 이것만 가지고 폭소를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전후 맥락을 알고 있다면 실신감 수준인 대사예요. 사실 이렇게 호들갑 떨 것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대사들도 모조리 이렇게 현실감이 부재할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죠. 일본 출판계가 예전부터 상업화에 굉장히 능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 본래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야 마땅하지만, 전 이런 소설가가 어떻게 해서 이즈미 쿄카 문학상, 타니자키 준이치로상, 카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을 휩쓸었는지 쉬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간신히 '취향 차이'를 감안해서 살짝 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SF 소설을 표방한 주제에 과학적 논거가 굉장히 희박하다는 점에서는 도무지 관대해질 수 없더군요. 제가 <나는 전설이다>가 기대에 못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별 두 개 반 밑으로 줄 수 없었던 까닭은, SF답게 - 솔직히 SF를 많이 못 읽은 제가 이런 표현을 쓸 자격이 있느냐 역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되려 이런 초보 독자마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츠츠이 야스타카가 안이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습니다. - 작가적 상상의 영역에 충분한 과학적 논거를 끌어들여 설명했기 때문이에요. 네, 최소한 <나는 전설이다>에는 풍부한 상상력과 고개를 끄덕일만한 과학적 논거가 있었으니, SF라는 장르에는 굉장히 충실했던 거죠. 제가 이 소설이 싫든 좋든, 이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반면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1965)에 수록된 소설들 중에서 SF를 표방한 두 편, 즉 표제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The other world'에서는 (전세계에 산재한 유치원생들에겐 몹시 굴욕적인 표현이지만) 유치원생조차도 할 수 있는 망상과 희박한 과학적 논거가 설득력 없이 결합된 게 고작입니다. 더 거칠게 말해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SF 소설에서 '과학'을 기대하신다면 차라리 고등학교 과학책을 한 번 더 읽어보시길 권하겠습니다. 아무리 평범한 과학 '교과서'에서라도, 최소한 츠츠이 야스타카의 SF 소설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상상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장르라는 게 거의 없어보이긴 합니다만, 그나마 호러 쪽에 가까워 보이는 '악몽'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예요. <웃지마>와 <인간 동물원>에서 유감없이 선보였던 이 사람의 질낮고 깊이 없는 심리학이 다시 한 번 펼쳐집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곧장 히스테리라고 못박고, 싸이월드나 블로그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는 '믿든 말든 정신분석학'으로 페이지를 때우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밤에 오줌 지리는 남자애 고추 떼어가겠다고 가위를 들고 있는 귀신이나, 복도를 굴러다니는 중년의 모가지 역시 매력 없긴 마찬가지고요. 네, 이런 걸 읽으려면 차라리 앞에서 언급한 믿든 말든 정신분석학 포스트나, 꼬꼬마 시절에 즐겨 읽던 <공포특급>을 선택하는 쪽이 효율적인 면은 물론이요, 정신 건강에도 더 좋습니다. 

*뱀다리* 
 
애니메이션이 훌륭한 건 순전히 애니메이션 고유의 장점이에요. 설정을 원작에서 빌려왔다는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하게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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