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랜드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06. 12. 21. 오후부터 틈틈이 읽어 밤에 완독.
 
고양된 기분은 언젠가 식어버린다는 것, 그것이 순리겠지요. <밤의 피크닉>으로 포문을 열어 <삼월은 붉은 구렁을>, <굽이치는 강가에서>까지 모두 손꼽을만한 소설이었으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 이번 달에만 무려 네 편이나 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최고조까지 이른 아찔한 상태에서, 단 하루만에 평정심을 되찾는다는 전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지면에서 살짝 붕 뜬 듯한 기분에 젖어있을 땐, 단 몇 일이나마 그 어떤 추한 일에도 일말의 관용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뭐 일상의 활력소랄까, 그 정도쯤 된다 이 말이에요.
 
1년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이런 행복한 기분을 망쳐버린 건 공교롭게도 <네버랜드>랍니다. 야속한 일이지요. 온다 리쿠 때문에 뛸 듯이 기뻤다가, 당일 밤엔 철저히 무덤덤해져 버졌어요. 아까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어요. 게다가 뭔가를 믿는다는 건, 먼 훗날 맛볼 실망을 전제해 두는 거잖아요. 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썩 반갑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건 썩 와닿지 않는 표현이더군요. 사실, 기본 설정만 두고 보면 닮은 꼴을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죠. 방학, 한 곳에 모여 몇 일간 합숙하는 아이들, 그리고 감춰놓은 비밀. 어때요, 비슷한가요. 하긴, 출판사에서 몇 자 적어놓은 책 소개를 보곤 저도 감쪽같이 속았으니까요. 그러나 <네버랜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에 비해 몇 수 정도 더 떨어지면 떨어졌지, 더 훌륭하다고 할만한 미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걸요.
 
온다 리쿠는 굉장한 이야기꾼이에요. 분명 소재나 기본설정은 대충 눈으로 훑어만 봐도 결말이 대충 보일 정도로 도식적이고 통속적이긴 하지만, 그 모든 걸 극복할만한 스토리텔링과 치밀한 구성 능력이 있어요. 문장에서 짙게 배어나오는 아련하고 그리운 듯한 묘한 느낌, 그리고 독자를 취하게 하는, 아름다우면서도 탁월하고 시의적절한 표현들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온다 리쿠는 모든 독자들의 DNA구조까지 연구하면서 글을 쓰는 게 아닐까, 라는 의심까지 들곤 해요. 어느 부분에서 어떤 표현을 쓰고, 여기에선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감춰야 하며, 어디에서 비밀을 터뜨려야 하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온다 리쿠라고 생각했어요. 제 아무리 지독히 진부한 소재라도 독자를 취하게 하는 힘, 그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요.
 
그런데 <네버랜드>를 읽고 있자면 이게 과연 정말 온다 리쿠가 맞긴 하나,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요. <굽이치는 강가에서>처럼 진부한 설정을 그대로, 그러나 구성미와 스토리텔링는 떼고. 제 아무리 고수라도 차포 뗀 장기에서 승승장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한 걸지도 몰라요. 차라리 장기는 상으로 뭘 잡기나 하지, 이야기에서 구성미와 스토리텔링을 떼면 도대체 뭐가 남겠어요. 독자를 취하게 만들었던 아련한 표현이요? 글쎄, 이번엔 그쪽도 영 아닌 듯 싶어요. 다작 작가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별 고민한 흔적도 보이지 않고 물흐르 듯 심심하게 계속되는 문장은 예전과 같은 읽는 맛이 결여되어 있어요.
(작가 후기를 읽어보면, 온다 리쿠 스스로 <네버랜드>를 쓸 때 모두 다섯 편의 소설을 집필중이라 밝혔으니까 단순한 추측성 발언은 아니에요.)
 
이제 남는 건 진부한 설정뿐이죠. 미스터리 구조가 사라진 이야기는 힘을 잃고, 속속들이 밝혀지는 비밀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아요. 누가 비밀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이제는 누가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할 것 같다는 걸 이미 독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비밀이란 건, 앞에서 일말의 궁금증을 살짝 흘려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목을 옭아매듯 독자 혼자 끊임없이 상상을 넓혀가게 한 다음, 쾅하고 폭로해야 재미있는 법이에요. 이런 점층적인 폭로의 기술도 없이, 단순히 치명적으로 아름답기만 한 미소년들의 과거지사를 1,2,3,4 순서에 맞게 '친절히' 이야기해 봐야 별 거 있을 리 없죠. 미소년 네 명이 각각 고히 간직했던 비밀들 사이에 단 한 줄기의 연결고리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역시 이야기를 더욱 느슨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요.
 
이래저래 하이텐션으로 온다 리쿠에 대한 찬사를 늘어놨던 어제 이맘 때를 생각하자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스스로부터 무척 좌절스러워요. 오, 세상에, 차라리 몇 일만 늦게 읽을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온다 리쿠는 신간이 손에 들어오는 족족 읽어야 하는, '여전히'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가니까 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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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1983 2006-12-3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참...사람마다 관점과 취향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는지 신기합니다.
그리고 <네버랜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보다 1년 먼저 나온 작품인데
님의 감상대로 생각한다면, 그럼 온다 리쿠는 한층 더 발전한 작가가 되는 셈이군요.
바숫한 설정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썼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