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태어나서부터 작년까진 단 한 번도 여름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어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땀이 나는데, 땀 흘리는 것을 발작적으로 혐오했거든요. 특히나 흠뻑 땀을 흘리고 나서 자연풍이나 에어컨 때문에 땀이 차가워지고 곧이어 말라버리는 그 느낌만큼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불쾌했습니다. 장마도 오지 않았을 무렵, 지인들에겐 한두 번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6월만 해도 그렇게 덥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이제, 중복도 훌쩍 지난, 본격적인 무더위의 초입이구요. 이 시기, 이 맥락에서 말해야만 비로소 일말의 진실성이 더해지는 겁니다. 네, 전 여름이 정말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제 손으로 에어컨이나 선풍기에 손을 댄 적이 없을 뿐더러, 너무 지쳐 무기력해지거나 갑작스레 화내는 일도 없었으니, 아마 맞을 거예요.
 
<유지니아>는 한여름입니다. 연일 작열하는 태양과 지독한 습도만으로도 체력이 달려오는데, 갑작스레 거무칙칙한 구름이 기습적으로 몰려와서 대기는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 무겁게 해요. 그러다가 장대비가 후두둑 솓아지는 곳. 이런 계절의 이런 장소가 <유지니아>의 배경입니다. 여태까지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지니아>는 이 배경을 촉각적, 후각적,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려는 데 주력해요. 실내 구석구석까지 잠식하며 짙게 깔린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각적 이미지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혀오는데, 코로 들어오는 건 공기를 강하게 짓누르는 습기의 냄새고, 피부는 이미 끈적한 땀투성이입니다. 바깥으로 나와도 별 차이는 없어요. 강렬한 원색은 아름답기보다는 무섭게 느껴지고, 한껏 달궈진 대기는 실내보다도 폭력적이에요. 비가 한차례 쏟아져도, 높은 습도 때문에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제가 <유지니아>를 에어컨 덕분에 적절히 온도 유지가 되고 있는 곳에서 읽어서 그렇지, 혹여 야외에서 읽었더라면 철저하게 질린 채 덮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유지니아>의 한여름은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치니까요.

어떤 분께서 "책을 읽고 이렇게 복잡한 심경에 빠지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든, 일단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4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분량의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을 들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문장의 밀도가 빡빡해서 어쩔 수 없이 읽는 속도가 더뎌진다든가, 아니면 그저 지루할 뿐이었다면 차라리 그냥 말을 안 하겠어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지만, 표지의 저 소녀, 정말 인상이 강하지 않나요? 사실, 제가 <유지니아>를 가장 (올 여름 온다 리쿠 출간작 중) 마지막으로 미뤄둔 건 순전히 이 표지 탓이라고 해도 좋아요. 독서를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인상이 강렬한 표지는 처음 봤거든요. 그게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간에 말이에요. 결국, <유지니아>를 읽는 동안, 십수 번씩은 다시 표지로 돌아가 저 소녀를 보고서 숨을 골라야 했어요. 독서가 한 발짝씩 진행될 때마다 저 소녀는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아릅답게도, 섬뜩하게도, 잔혹하게도, 추레하게도 보였습니다. 몇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한 그림에서 이만큼 복잡한 인상을 받은 기억은 전무해요.

앞서 <유지니아>가 이미지에 유난히 집착한다는 점에서도 여태껏 출간된 온다 리쿠의 소설들과도 궤를 달리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문체뿐만 아니라, 구성에서도 <유지니아>는 이질적이에요. 분명 온다 리쿠가 구성미에 공을 크게 들이는 작가인 것은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긴 하지만,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이어 <유지니아>까지, (우연인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의 온다 리쿠는 <굽이치는 강가에서>를 쓰던 그녀와 꽤나 달라보입니다. <굽이치는 강가에서>만 해도 플롯을 짜는 아이디어는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진실 또한 백 가지", 혹은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등에서 착상한 듯한 면모가 보이지만, 분명 후반에 근접할수록 '좀 더 순수한 진실'에 가까워졌어요. 뒤쪽의 정보가 앞쪽의 정보를 일부 부정하며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구성이었죠. 하지만,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부터는 정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에 무게를 실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예전보다 화자도 늘었고, 구성도 복잡해졌어요. 거짓말에 대한 거짓말,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굳이 규정을 하자면 메타픽션의 냄새가 짙어졌습니다. '메타픽션'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소리로 몰이해를 이해하는 척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게 아니에요.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며 '진실/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뭉개버리고 시니컬한 투로 즐거워하는 온다 리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리더니, 이번 <유지니아>를 읽을 땐 아예 인간 한 명의 존재를 싸그리 지워버리고,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지워버리며 놀려는 의도가 슬쩍 엿보이더군요.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이였다면 분명 주인공이자 화자였을 저 소녀는 결국 끝까지 단 한 번도 무대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건의 핵심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소녀는 매번 타인의 시선을 빌려 피상적이고 유동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이에요. 그러므로, 우스운 일이지만 <유지니아>엔 저 소녀가 없습니다. 표지의 저 소녀에게서 복잡한 인상을 받은 것 또한 다 이런 구성 탓일 겁니다.

그렇다고 <유지니아>에서 온다 리쿠의 냄새가 전혀 안 나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 썩 신경을 쓴 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이미지 또한 그 사용법은 다분히 온다 리쿠다워 보입니다. 문체가 너무나 세세해서 당장 곧이곧대로 영상화되는 스타일 같진 않습니다. 각 이미지에 대응하여 독자들이 제각기 품고 있는 기억의 '핵'에 온다 리쿠가 '중성자'를 하나 삽입해 주는 식처럼 보여요. 그럼 그 '핵'은 독자들 제각기의 추억과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터져 나오겠지요. 뭐, 이젠 온다 리쿠 앞에 붙는 상투적 수식어가 됐지만,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는 칭호도 다 이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쩌다 보니, 너무나도 많은 추측을 전제한 글이 돼버려서 감당이 잘 안 되는군요. 막상 써넣고 보니 걱정입니다. 하지만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이나 <유지니아> 같은 온다 리쿠의 최근작을 대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면 꽤 즐거워서 할 말도 많아지거든요. 누구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대하고 있던 거다"라고 환호하는 반면, 또 누구는 "온다 리쿠에게 점차 실망하고 있다"라고 투덜거리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데, 여하튼 뭔가 변화가 있는 건 사실이란 소리겠지요. 저야, 열렬히 환호하고 있는 편에 속합니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드 게임 도코노 이야기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아이돌 그룹마냥 남자애들만 잔뜩 나오던 <네버랜드>를 제외한다면, 그동안 발간된 온다 리쿠 소설에선 정말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최소 한 명씩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엔드 게임>은 마음에 쏙 드는 캐릭터를 찾을 수 없었던 첫 번째 온다 리쿠 소설로 기록되겠지.

솔직히 '도코노 일족'이라는 맥락을 완벽하게 삭제해버린다면, <엔드 게임>은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소재에 좋아할 만한 구성을 택한 소설이 맞다. 사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뭉개버린 이야기는 애초에 일정 수준 이상의 구성미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늘상 평작 이상은 쉬이 찍어주니 편애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엔드 게임>은 이런 기본을 충족했음은 물론, 시종일관 열대야에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는 비처럼 어둡고 불쾌한 이미지를 시각적, 촉각적으로 썩 괜찮게 전달한다. 또한 다소 느긋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민들레 공책>에 비해, '뒤집고' '뒤집히는' 스릴러적 요소가 강한 <엔드 게임>은 템포가 굉장히 빨라, 구성이 꽤 복잡하면서도 묘하게 가독성이 뛰어나다. 여태까지 온다 리쿠가 선보였던 장르들과도 꽤나 이질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엔드 게임>의 '하이지마 일가'를 '도코노 일족'이란 맥락 속에서 읽어본다면 그 존재 방식이나 의의에 고개를 절로 갸우뚱거리게 된다. 도대체 '뒤집고', '뒤집히는' 게 어떻게 중요한지를 모르겠다. 물론 본문에서 상당량의 설명이 대사를 통해 전달되지만, 그게 어떤 방면에서 유용한지는 여전히 궁금할 뿐이다. 그에 비해 '먼 눈'과 '넣어두기'의 유용함이란 단 한 마디로 쉬이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도 명료하지 않았던가. 도코노 일족 안에서 굳이 다시 한 번 '빛'과 '어둠'으로 나눌 필요가 있었나 의문이다. 딱히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없었다는 것도 상당 부분 이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들레 공책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사토코님을 '넣어'둔다느니, 크게 '울렸다'느니, '거풍'에 들어간다느니, 온갖 작은따옴표('')로 장식된 낯선 용어들을 쓰면서도 불친절하게 아무 설명도 없이 이야기를 꾸려나가다니. 이런 불친절함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런 불친절함을 썩 좋아하는 편입니다. 나가노 마모루의 <F.S.S.>와 권교정의 <매지션>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에요. 첫 번째 독서는 난무하는 작은따옴표에 당황스럽기 짝이 없지만, 독서가 거듭되고 시리즈가 쌓이다 보면, 굳이 작가 설정집 같은 게 없더라도 맥락 속에서 상당 부분 꽤 정확한 뜻을 뽑아낼 수 있지요. 독서를 마치고 권말에 수록된 설정집을 통해 과연 내가 추론한 게 얼마나 옳은가 하나하나씩 맞춰보는 것도 꽤 쏠쏠한 놀이입니다. 틀리는 경우도 많지요. 그러나 아주 어쩌다 가끔은 독자 스스로 상상한 바가 훨씬 낭만적이고 재미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굳이 중학교 중간-기말고사를 치는 것처럼 째째하고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다는 거죠. 정작 중요한 건,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게임을 얼마나 신나게 즐길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빛의 제국> 하루타 일족이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민들레 공책>은 앞서 언급한 두 작품에 비해 쓰이는 용어가 압도적으로 적은 편이니, 사실 그렇게 머리 아플 일은 없어요.

일단 <빛의 제국>을 괜찮게 본 독자도, 또 이야기에 완결성이 너무 없다고 툴툴거리던 독자도 <민들레 공책>은 무난하게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도코노 일족의 조심스럽고 살가운 삶은 여전하고, 이번엔 이야기도 비교적 뚜렷하니까요. 다만, 염려되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이 메이지 유신 이후 정신없이 근대화 과정을 밟아가던 때인지라, 이 시대의 일본에 유난히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국 독자들에겐, 그 방향성이 어찌되었든, 일말의 정치적 발언도 왠지 위험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결론이라도 말하는 게 편하겠지요. 그동안 온다 리쿠의 소설을 줄기차게 읽어오신 분들은 충분히 지레짐작하시겠지만, 원래 온다 리쿠는 이런 거창한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잖아요. 이번에도 근대화란 일련의 움직임은 <민들레 공책>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던 마키무라 촌락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시끄럽고 수상쩍은' 것 정도로, 왠지 시니컬한 시각으로 비춰질 뿐이에요. 우리는 그 결과까지 알고 있지요. 결국 본토에 핵폭탄 두 발 투하된 게 전부. 네, 정말이지 <민들레 공책>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정치가들이 '좌우지간 큰 목소리로' '늘 호통만 치'며 강조해대는 건 '진절머리가 날' 뿐더러, 결국 누구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

잡소리가 너무 길었나 모르겠지만, 요는, 그저 안심이란 거죠. 개인적으론 <빛의 제국> 연작 시리즈 중에서 하루타 일족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는 편이었고요. 또 <빛의 제국>과 함께 책장에 꽂아두니, 참 예쁘더군요. 새삼스럽지만, 장정은 정말 괜찮게 해서 나와주는 것 같아요. 비싸진 책값은 살짝 차치하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 들어 영화에 흥미를 잃었다. 근 한 달 동안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는데, 이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던 그 날은 30분도 안 돼, 당장 상영관을 뛰쳐나오고 싶었다. 분명 예전이라면 분명 괜찮게 봤을 만한 영화였다.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고 끝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만, 덕분에 힘이 다 빠져 아주 지치고 말았다.
 
한 달 동안, 간혹 심심해지거든, 왜 (갑자기) 영화가 싫어졌나 생각을 해 봤는데, 늘상 그렇듯 뒤늦게 억지로 붙인 이유들은 신통치 않은 법. 그러다가 요즘 보르헤스의 메타픽션들을 설렁설렁, 그러나 신나게 읽다가, 그리고 어제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다가 겨우 떠올랐다. 진부한 이유다만, 나도 이젠 현실이 아닌 허구적 이야기가 마치 현실인 것마냥 떠드는 걸 보고 있자면, 갑작스레 위화감이 온몸을 휘젓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허구에서 시작했다면, 자신이 '현실'이 아닌, 명백한 창작물에 불과하며, '허구'라는 자각을 확실히 하고 있는 편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걸 극사실주의니 뭐니 하는 사조상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다만, 내 경우는 그 이전에 영화와 소설, 장르상의 문제인 듯하다.
 
당장 영화에서는 실제 살아있는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부터 과연 이게 허구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모든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지금의 내겐 이것이야말로 영화와 소설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다. 실험 영화든 뭐든, '영화 촬영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 나와 비슷하게 살아갈 인간'이 내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허구가 갖을 수 있는 매력을 상당 부분 잃고 만다. 이는 내가 영화 속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다만, 영화라는 허구가 실사의 영역에 들어선 이상, 지금의 난, 그만 심드렁해져 버린다는 소리다.
 
하지만, 비록 같은 영화라 할지지라도, 추측하건대 - 오늘까지 한달 간 계속 영화를 안 봤으니 확신은 못 한다 -,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300> 같이 처음부터 과장스레 테크놀리지의 위대함(?)을 오만하게 내세우는 엔터테인먼트 영화들을 여전히 큰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거대한 뻥'이었을 뿐이니까. 뭐, 그 외의 이유는 단지 영화가 싫어졌다는 사실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관 관람비와 교통비를 합쳐 차라리 책을 한 권 더 사겠다느니, 영화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너무 크다느니 하는 기타 등등. 핑계를 대자면 끝도 없다.
 
그에 비해 책의 경우 - 소설 외 만화책까지 포함한 모두 - 는 사조나 하위 장르 따위를 넘어 아무거나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몇천 년에 걸친 풍부한 양이며, 언제 어디서나 '책을 펴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홀가분함. 또 유사 이래 새로운 것 없다는 신의 말씀 - 난 그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 아래, 결국 '책에 대한 책',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손을 대는 등, 이 세계의 끝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는 내내 흥분을 감출 수 없어서, 맞장구칠 사람 한 명 없었는데도, 혼자서 "이야!"를 연발하거나, 깊게 숨을 고르며 읽어야 했다. 이 정도라면, <굽이치는 강가에서> 이후로 거의 1년만에 맛보는 흥분(바로 이전엔 <삼월은 붉을 구렁을>). 그리고 아직 올해엔 소설을 읽으며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흥분. 바로, 이번에야말로 온다 리쿠다.
 
재미있는 건,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면서 보르헤스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구성미만큼은 분명 이전까지 확연하게 포착하고 있던 온다 리쿠의 솜씨 그대로였지만, 이야기 - 특히 연극 - 의 관습을 이리저리 변형하고 다시 짜맞추며 장르 본연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언급하며 신나게 노는 모습에선 메타픽션적인 면모가 진하게 드러난다. 사실, 지금껏 온다 리쿠가 극중극 형식을 능숙하게 사용했으며, <여섯 번째 사요코>, <흑과 다의 환상> 등에서도 연극신을 비중있는 장치로 쉬이 다뤄왔다는 걸 감안한다면,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호텔 정원에서', '나그네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세 이야기의 위상, 즉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를, 또한 어떤 이야기가 더 포괄적인지를 놓고 마지막까지 독자와 놀아보자는 끈질기고도 치밀한 면모에는 실로 경이로울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온다 리쿠의 감성적 낭만을 극한으로 몰아붙인 <라이온하트>의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라이온하트>를 예로 든다면야, 온다 리쿠의 '감성적 낭만'을 그저 순정만화틱한 '감성적 과잉'으로만 한정지어 읽을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그렇지만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오로지 형식만으로도 얼마든지 낭만을 펼칠 수 있다는 온다 리쿠의 자부심이 한껏 드러난 소설인만큼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닐 것이다.
 
온다 리쿠는 매번 낭만을 읊조리지만, 창작물과 허구의 한계, 그리고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며 난 그렇게 느꼈고, 또한 이렇게까지 된 이상, 설령 온다 리쿠가 앞으로 허섭스레기 같은 소설을 쓸지언정, 그녀의 팬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행우주 -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교양과학을 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재밌다'느니 '쉽다'느니, 혼자 떠들어대도 일단 비교 대상이 될 표본 집단이 비극적으로 적기 때문에 신용해 줄 사람이 없으므로, 정말 편하다. 누군가가 "아니, 이거 당신이 재밌다면서요? 근데 완전 천박하네요. 쳇, 당신 수준도 알만하군요."라고 비난을 퍼부어도, "난 어차피 허접이걸랑요, 흥흥!" 한 마디로 가볍게 피해 줄 수 있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무책임하게 떠들어야지. 네, <평행우주>는 완전 재미있을 뿐더러, 정말 쉽습니다.
 
앞서 '내 말을 더 이상 신용하지 마시지요'라는 투로 잔뜩 말해놨으니, 이제와서 뒷수습하긴 너무 늦었다만, 사실 <평행우주>는 전에 읽었던 <우주의 점>, <시간의 역사>는 물론이요, 심지어 거의 간략한 입문서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보다도 훨씬 친절하다(다시 한 번, 정말 쉽다!). 비록 이해를 돕는 삽화나 사진 같은 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550페이지에 이르는 본분 중 반 이상을 기초부터 최신 이론, 상대성 이론의 거시적 우주론부터 양자역학의 미시적 세계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데 쓰기 때문에 달리 대단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평행우주>를 받아들이는 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럼, 뭐, 좀 아는 사람은 엄청 지루할 것 아니야?" 물론, 꼭 그렇지도 않다. 매번 '헉' 소리가 터져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독설을 기관총처럼 쏴대며 과학사에 길이 남으신 학자'님'들의 배틀이 몹시 재미있다. 자기네들 사고의 깊이를 맹신하는 문과형 인간들 중에서, 종종 물리학자나 천문학자 등 순수과학에 매진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분들에겐 특히 가모브와 호일 사이엔 일었던 '빅뱅 이론 vs 정상상태 이론'과 리처드 파인만의 짓궂은 농담만이라도 따로 읽어보시라 권해 드리고 싶다.
 
신은 우주를 창조하면서 질량수가 5인 원소를 빼먹는 바람에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에 깊이 실망한 신은 우주를 축소시킨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신이 행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신은 "호일이 있으라!"고 선언했고, 그의 말대로 호일이 나타났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인 호일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좋으니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자 호일은 별 속에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폭발하는 초신성의 주변에 뿌려놓았다. 
  
                                                                        - <평행우주> 115p, 1957년 조지 가모브 -
 
일단 이런 유머가 절로 체득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당신도 좀 훌륭하긴 하군."이라며 프레드 호일의 이론을 인정하는 척하며 끝내 '그래도' 자신의 빅뱅 이론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는 걸 "호일이 있으라!"라는 훌륭한 유머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의표를 찌르는 독설로 상대방을 실신으로 몰아가는 프레드 호일의 과격한 언사도 가만히 살펴보면 사뭇 격조 높은 문화적 소양이 엿보이므로 실로 감탄스럽지만, 일단 난 그걸 다 농담으로 받아치는 조지 가모브 아저씨에게 한 표 던진다. (짝짝!) 참, 끈이론학자 존 슈바르츠를 보고 "하이, 존! 오늘은 몇 차원에서 살고 계신가?"라고 한 리처드 파인만의 농담도 웃겼다.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가다가 던진 말이라고 하던데, 무심코 번뜩인 생각이든,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다가 때를 노린 것이든, 요새 신체 가학-피학적인 코미디 따위들을 몇백 개씩 싸그리 담아도 따라잡을 수 없는 고차원의 경지다. 거듭 박장대소하며 감탄.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초적인 지식이 있는 독자들도 썩 긴 분량을 무리 없이 소화하다가, 양자역학에 이르러 슬슬 본론으로 접어들면서 낭만적 세계가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미치오 카쿠, 이 사람 글솜씨가 은근 교묘한 게, SF 뺨칠만한 상상의 세계를 독자 앞에 던져줘 놓고 호기심을 잔뜩 고양시킨 후, "이런저런 역설 때문에 곤란해요."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또 다른 시점에서 이야기를 한다. 계속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식인데, 와아와아 거리며 쫄래쫄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논의의 스케일이 한참 커져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세 번째 파트부터 마지막까진 너무 신나서 그대로,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멈추지 않고 읽었다. 네, 전 소심하고 게으른 인간인지라 웜홀을 타고 다른 우주로 탈출까지 해야 하는 드라마틱한 삶은 사양하겠습니다만(그냥 미치오 카쿠님과 낭만적 상상만 할게요 -_-;;), 우아한 통일장이론의 완성만큼은 구경하고 죽을 수 있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