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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 들어 영화에 흥미를 잃었다. 근 한 달 동안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는데, 이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던 그 날은 30분도 안 돼, 당장 상영관을 뛰쳐나오고 싶었다. 분명 예전이라면 분명 괜찮게 봤을 만한 영화였다.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고 끝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만, 덕분에 힘이 다 빠져 아주 지치고 말았다.
한 달 동안, 간혹 심심해지거든, 왜 (갑자기) 영화가 싫어졌나 생각을 해 봤는데, 늘상 그렇듯 뒤늦게 억지로 붙인 이유들은 신통치 않은 법. 그러다가 요즘 보르헤스의 메타픽션들을 설렁설렁, 그러나 신나게 읽다가, 그리고 어제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다가 겨우 떠올랐다. 진부한 이유다만, 나도 이젠 현실이 아닌 허구적 이야기가 마치 현실인 것마냥 떠드는 걸 보고 있자면, 갑작스레 위화감이 온몸을 휘젓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허구에서 시작했다면, 자신이 '현실'이 아닌, 명백한 창작물에 불과하며, '허구'라는 자각을 확실히 하고 있는 편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걸 극사실주의니 뭐니 하는 사조상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다만, 내 경우는 그 이전에 영화와 소설, 장르상의 문제인 듯하다.
당장 영화에서는 실제 살아있는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부터 과연 이게 허구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모든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지금의 내겐 이것이야말로 영화와 소설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다. 실험 영화든 뭐든, '영화 촬영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 나와 비슷하게 살아갈 인간'이 내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허구가 갖을 수 있는 매력을 상당 부분 잃고 만다. 이는 내가 영화 속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다만, 영화라는 허구가 실사의 영역에 들어선 이상, 지금의 난, 그만 심드렁해져 버린다는 소리다.
하지만, 비록 같은 영화라 할지지라도, 추측하건대 - 오늘까지 한달 간 계속 영화를 안 봤으니 확신은 못 한다 -,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300> 같이 처음부터 과장스레 테크놀리지의 위대함(?)을 오만하게 내세우는 엔터테인먼트 영화들을 여전히 큰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거대한 뻥'이었을 뿐이니까. 뭐, 그 외의 이유는 단지 영화가 싫어졌다는 사실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관 관람비와 교통비를 합쳐 차라리 책을 한 권 더 사겠다느니, 영화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너무 크다느니 하는 기타 등등. 핑계를 대자면 끝도 없다.
그에 비해 책의 경우 - 소설 외 만화책까지 포함한 모두 - 는 사조나 하위 장르 따위를 넘어 아무거나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몇천 년에 걸친 풍부한 양이며, 언제 어디서나 '책을 펴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홀가분함. 또 유사 이래 새로운 것 없다는 신의 말씀 - 난 그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 아래, 결국 '책에 대한 책',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손을 대는 등, 이 세계의 끝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는 내내 흥분을 감출 수 없어서, 맞장구칠 사람 한 명 없었는데도, 혼자서 "이야!"를 연발하거나, 깊게 숨을 고르며 읽어야 했다. 이 정도라면, <굽이치는 강가에서> 이후로 거의 1년만에 맛보는 흥분(바로 이전엔 <삼월은 붉을 구렁을>). 그리고 아직 올해엔 소설을 읽으며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흥분. 바로, 이번에야말로 온다 리쿠다.
재미있는 건,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면서 보르헤스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구성미만큼은 분명 이전까지 확연하게 포착하고 있던 온다 리쿠의 솜씨 그대로였지만, 이야기 - 특히 연극 - 의 관습을 이리저리 변형하고 다시 짜맞추며 장르 본연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언급하며 신나게 노는 모습에선 메타픽션적인 면모가 진하게 드러난다. 사실, 지금껏 온다 리쿠가 극중극 형식을 능숙하게 사용했으며, <여섯 번째 사요코>, <흑과 다의 환상> 등에서도 연극신을 비중있는 장치로 쉬이 다뤄왔다는 걸 감안한다면,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호텔 정원에서', '나그네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세 이야기의 위상, 즉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를, 또한 어떤 이야기가 더 포괄적인지를 놓고 마지막까지 독자와 놀아보자는 끈질기고도 치밀한 면모에는 실로 경이로울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온다 리쿠의 감성적 낭만을 극한으로 몰아붙인 <라이온하트>의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라이온하트>를 예로 든다면야, 온다 리쿠의 '감성적 낭만'을 그저 순정만화틱한 '감성적 과잉'으로만 한정지어 읽을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그렇지만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오로지 형식만으로도 얼마든지 낭만을 펼칠 수 있다는 온다 리쿠의 자부심이 한껏 드러난 소설인만큼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닐 것이다.
온다 리쿠는 매번 낭만을 읊조리지만, 창작물과 허구의 한계, 그리고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며 난 그렇게 느꼈고, 또한 이렇게까지 된 이상, 설령 온다 리쿠가 앞으로 허섭스레기 같은 소설을 쓸지언정, 그녀의 팬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