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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06년 3월
평점 :
솔직히 교양과학을 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재밌다'느니 '쉽다'느니, 혼자 떠들어대도 일단 비교 대상이 될 표본 집단이 비극적으로 적기 때문에 신용해 줄 사람이 없으므로, 정말 편하다. 누군가가 "아니, 이거 당신이 재밌다면서요? 근데 완전 천박하네요. 쳇, 당신 수준도 알만하군요."라고 비난을 퍼부어도, "난 어차피 허접이걸랑요, 흥흥!" 한 마디로 가볍게 피해 줄 수 있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무책임하게 떠들어야지. 네, <평행우주>는 완전 재미있을 뿐더러, 정말 쉽습니다.
앞서 '내 말을 더 이상 신용하지 마시지요'라는 투로 잔뜩 말해놨으니, 이제와서 뒷수습하긴 너무 늦었다만, 사실 <평행우주>는 전에 읽었던 <우주의 점>, <시간의 역사>는 물론이요, 심지어 거의 간략한 입문서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보다도 훨씬 친절하다(다시 한 번, 정말 쉽다!). 비록 이해를 돕는 삽화나 사진 같은 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550페이지에 이르는 본분 중 반 이상을 기초부터 최신 이론, 상대성 이론의 거시적 우주론부터 양자역학의 미시적 세계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데 쓰기 때문에 달리 대단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평행우주>를 받아들이는 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럼, 뭐, 좀 아는 사람은 엄청 지루할 것 아니야?" 물론, 꼭 그렇지도 않다. 매번 '헉' 소리가 터져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독설을 기관총처럼 쏴대며 과학사에 길이 남으신 학자'님'들의 배틀이 몹시 재미있다. 자기네들 사고의 깊이를 맹신하는 문과형 인간들 중에서, 종종 물리학자나 천문학자 등 순수과학에 매진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분들에겐 특히 가모브와 호일 사이엔 일었던 '빅뱅 이론 vs 정상상태 이론'과 리처드 파인만의 짓궂은 농담만이라도 따로 읽어보시라 권해 드리고 싶다.
신은 우주를 창조하면서 질량수가 5인 원소를 빼먹는 바람에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에 깊이 실망한 신은 우주를 축소시킨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신이 행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신은 "호일이 있으라!"고 선언했고, 그의 말대로 호일이 나타났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인 호일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좋으니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자 호일은 별 속에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폭발하는 초신성의 주변에 뿌려놓았다.
- <평행우주> 115p, 1957년 조지 가모브 -
일단 이런 유머가 절로 체득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당신도 좀 훌륭하긴 하군."이라며 프레드 호일의 이론을 인정하는 척하며 끝내 '그래도' 자신의 빅뱅 이론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는 걸 "호일이 있으라!"라는 훌륭한 유머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의표를 찌르는 독설로 상대방을 실신으로 몰아가는 프레드 호일의 과격한 언사도 가만히 살펴보면 사뭇 격조 높은 문화적 소양이 엿보이므로 실로 감탄스럽지만, 일단 난 그걸 다 농담으로 받아치는 조지 가모브 아저씨에게 한 표 던진다. (짝짝!) 참, 끈이론학자 존 슈바르츠를 보고 "하이, 존! 오늘은 몇 차원에서 살고 계신가?"라고 한 리처드 파인만의 농담도 웃겼다.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가다가 던진 말이라고 하던데, 무심코 번뜩인 생각이든,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다가 때를 노린 것이든, 요새 신체 가학-피학적인 코미디 따위들을 몇백 개씩 싸그리 담아도 따라잡을 수 없는 고차원의 경지다. 거듭 박장대소하며 감탄.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초적인 지식이 있는 독자들도 썩 긴 분량을 무리 없이 소화하다가, 양자역학에 이르러 슬슬 본론으로 접어들면서 낭만적 세계가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미치오 카쿠, 이 사람 글솜씨가 은근 교묘한 게, SF 뺨칠만한 상상의 세계를 독자 앞에 던져줘 놓고 호기심을 잔뜩 고양시킨 후, "이런저런 역설 때문에 곤란해요."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또 다른 시점에서 이야기를 한다. 계속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식인데, 와아와아 거리며 쫄래쫄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논의의 스케일이 한참 커져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세 번째 파트부터 마지막까진 너무 신나서 그대로,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멈추지 않고 읽었다. 네, 전 소심하고 게으른 인간인지라 웜홀을 타고 다른 우주로 탈출까지 해야 하는 드라마틱한 삶은 사양하겠습니다만(그냥 미치오 카쿠님과 낭만적 상상만 할게요 -_-;;), 우아한 통일장이론의 완성만큼은 구경하고 죽을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