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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띠지, 작가 소개, 역자 후기 같은 시시한 걸로 시비거는 것도 이제 슬슬 질려오는 감이 있지만, 이번만큼은 과장이 너무 심하다 싶어 먼저 짚고 넘어간다. "누구도 발 들인 적 없는 인간 심층의 가장 깊은 곳, 저 어둡고 추운 창살 안의 세계. 장르 불명, 규정 불가, 지금까지 이런 소설을 없었다"라니. 글쎄, 우선, 이런 '소설'은 예전부터 있었다. 아니, 이런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고 해야 하나. <ZOO>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면서 몇몇 영화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다는 인상을 거듭 받았는데, 설마 출판사 편집팀이 나보다 문화적 소양이 얕을 리가 없고. 그냥, 이 정도 선에서 멈췄다면 '어차피 띠지는 광고 최전선이 아니냐'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해가며 넘어갈 수도 있었겠다만, '장르 불명, 규정 불가'라는 표현까지 앞에 붙고, 뒤에서는 '시대의 천재'까지 운운하다니, 차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ZOO>는 '장르 불명, 규정 불가'가 아니라, 그저 다양한 장르 - (도시괴담적 성격이 강한) 호러, 추리, (조금은 약한) SF, 미스터리 등 - 의 단편을 소설집 하나로 묶어낸 결과물에 불과하다. 각 소설 한 편 한 편의 장르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따라서, 얼마든지 규정할 수 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ZOO>는 호러, 추리, SF, 미스터리 소설을 모은 단편집이다). 뭐, '시대의 천재' 같은 상투구까지 시비를 걸고 싶진 않았다만, 표지 앞날개에 쓰여진 작가 소개란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시대의 천재'가아니라,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천재 작가'랜다. 아, 길기도 해라. 키보드 두드리기도 힘들다. 뒤에서 좀 더 이야기하겠다만, 17살에 소설 하나 냈다고 개나소나 천재라고 하기엔 세상에 천재가 너무 많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천재 작가'라고까지 하려면, 미시마 유키오급의 스탯은 찍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오츠이치가 형편없는 작가라는 소리는 아니다. (자꾸 우려먹어서 조금은 미안하다만) 사토 유야나 니시오 잇신처럼 문장의 기본이나 소재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 관념조차 갖춰지지 않은 라이트노벨 작가군들에 비하자면(이 작가들 글을 읽고 있자면 괜히 나마저 부끄러워져서 이마를 탁치며 '어이쿠!' 소리를 내게 된다), 일정 수준의 문학적 소양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예전에 출판된 <쓸쓸함의 주파수> 같은 경우를 살펴 본다면, 오츠이치는, 앞서 언급한 (게임 감성에 도취된) 라이트노벨군 작가들처럼 매우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담담하면서도 조금은 여려보이는 이 작가의 문체는 잔혹한 소재를 다룰 때 효과가 증폭된다. 이는 <ZOO>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만, 특히 'SEVEN ROOMS'와 '신의 말'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SEVEN ROOMS'를 높이 쳐주고 싶은데, 호러에서 플롯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 제대로 모르는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영화 <쏘우>와 소재 면에서 몇몇 겹쳐지는 부분이 있긴 하다만, <쏘우>의 장르를 호러로 분류하기에는 'SEVEN ROOMS'보다 결핍된 요소가 너무 많은 주제에, 쓸데없이 반전이니 뭐니 사족이나 달다가 언페어까지 범한 경우다.
오츠이치가 이래저래 장점이 많은 작가고, <ZOO>에 실린 소설들 중 몇몇 괜찮은 소설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천재'라는 간판이 과분한 이유는 뒤에 실린 소설들 중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게다. 특히 '혈액을 찾아라'는 매우 안이하다. 이 정도라면 초등학생도 상상할 수 있는 플롯이고, 문장력 또한 삼류 인터넷 소설급 정도로 밀도가 떨어진다.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는 그 정도까지 심하지는 않지만, 역시 앞쪽에 실린 소설들과 비교하자면 수준 편차가 지나치다. 그외 '카자리와 요코'는 왠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즐겨 읽던 <공포특급> 같은 도시괴담집에서 한두 번쯤은 본 듯한 식상한 느낌이고, '양지의 시' 역시 몇십 년 전부터 SF로 신물나게 써먹었던 진부한 이야기였다.
오늘 새벽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 잠시 펴봤다가 (잠 많은 내가!) 결국 끝까지 다 읽고 말았을 정도로 재미도 있고, 가독성도 상당히 뛰어난 건 인정할 만하지만, 그래도 저 띠지와 작가 소개는 뻥이 너무 지나치다. 게다가 수록작들의 완성도 편차가 크다는 점에서도 마냥 후하게 점수를 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