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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첫 번째 문단에서 '쇼비니즘'은 '광신적 애국주의'라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한 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몹시 큰 자부심을 느낄 때가 있는데, 좌우간 신나는 일이 지천에 널려있다는 게다. 각종 '~ism'에 경도되어 있는 시대착오적 쇼비니스트들이나, 특정 집단을 향한 열렬한 증오심에 불타는 미친 멍멍이 자제분들께서 전국에 산재해 계시거늘, 어찌 아니 즐거울 틈이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 중 하나인 '싸움 구경'이 정보통신 테크놀로지의 경이로운 발전과 함께 매초마다 갱신되는, 그런 훌륭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조금 더 재미있게 즐기고 싶다면, 간혹 공부를 살짝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방법론이야 제각기 너무나도 다르므로, 그 경우의 수는 차마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겠다만, 개인적으로 페미니즘과 파시즘으로의 모험은, 개중, 시간 투자 대 효율성 면에서 단연 탁월한 편에 속하리라고 생각한다.
워낙 익숙한 광경인지라 굳이 설명할 가치도 못 느낀다만, 여하튼 페미니즘은 당장 머릿수에서 절망적인 열세를 보인다. 물론, 본래 페미니즘이 주류 언어정치학에 대항하는 소수자의 담론이며, 그 역사도 그렇게 긴 편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절망적인 열세란 일종의 숙명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여기에 한국 사회 특유의 마초적 풍토가 겹쳐, 거의 '벼랑 끝' 수준이다. 덕분에 웬만큼 탄탄한 논리를 갖추고도 머릿수의 압도적인 폭력을 이기기란 쉽지 않으므로, 날림으로 후다닥 공부해서는 써먹을 기회조차도 없다. 그래도 일단 몇 번의 실전 토론 경험만 쌓는다면, 전투력 증진의 폭은 거의 직각에 수렴할 정도로 대단하다. 물론, 페미니즘이 몸에 안 맞는다면야, 굳이 억지로 익힐 필요는 없다만, 언어학과 정치학에 조금이나마 흥미가 있다면 잠시나마 접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이에 비해, 파시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뚜렷한 정의와 개념도, 사고의 틀도 아닌, 언어로 정리하고 규정하기 힘든 실재(real)의 광대한 기록들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모호함으로 뒤덮인 게 파시즘이라고 해도 될 정도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의 이런 특성 때문에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아무 맥락에서나 남발되는 경향이 매우 짙다. 언론에 노출 빈도가 잦은 표현은 많은 이들이 "당연히 '나'는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본다면, 단편적인 이미지만 떠오를 뿐, 실상 아는 게 전무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실제로 그 표현이 적용될 만한 실례가 나타나도, 이미지에 의존한 감정적이고 획일적인 대응밖에 하지 못 하다가 맥없이 무너질 때가 허다하다. 파시즘도 마찬가지이다. 저자 팩스턴이 지적한 대로, 파시즘을 '제대로(팩스턴이 인정하듯이 본래 파시즘이란 게 모호하기 때문에 다분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이해하지 못 한다면, 막상 파시즘이 다시 출현하더라도 아예 눈치채지 못 하거나, 대응을 미비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파시즘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고, 최근의 황우석 사태와 <디워>를 둘러싼 공방에서 쇼비니즘의 징후를 실컷 맛볼 수 있었던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팩스턴의 시도는 상당히 성공적이다. 개인적으로 <파시즘>의 장점은 방대한 자료에서 뽑아낸 압도적인 정보량에 있다고 본다. 전체 600페이지 수준의 분량에 본문이 490페이지, 나머지는 주석과 연표인데, 주석만 해도 700여 개는 족히 된다. 하지만 파시즘의 탄생부터 최후까지 여섯 단계를 각 장으로 나누어, '먼저 사실을 앞세워 서술한 후에, 그 사실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서술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저자가 조심스레 비판적 재평가를 한다'는 전략이 거듭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정보가 꽤 체계적이고 친절하게 정리되어 가기 때문에 독서에 앞서 겁부터 집어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결코 만만한 두께는 아니지만, 쉽게 읽힐 뿐더러, 파시즘에 관한 막대한 사실과 기존의 견해를 세세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유용하다. 한마디로, 정가 27,000원이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