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와 '유코', 이렇게 두 편이 실린 소설집입니다. 17살 때 쓴 거라더군요. 물론 저는 이 책을 팔아먹어야 하는 입장이 아니므로, 이 소설이 작가가 몇 살에 쓴 것이라고 강조할 필요도, 굳이 그걸 감안해가며 읽어야 할 의무도 없죠.

질투심에 사로 잡힌 여자애가 나무 위에서 우발적으로 친구의 등을 밀어버립니다. 추락사죠. 죽일 생각까진 없었으니까 어린 마음에 우왕좌왕하다가 그만 오빠에게 들켜버리고요. 그러나 오빠가 사체 유기를 제안하고, 그리하여 시작된 사흘에 걸친 두 남매의 사체유기담이 바로 표제작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입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사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광경은 꽤 으스스한 느낌을 주지만, 결정적으로 대사가 후지고, 아직 훈련이 덜 된 이 작가는 우연을 남발하는 경향이 짙어요.

먼저 대사를 조금 살펴 보죠. 엄마가 끈질기게 구는 걸 보고 '바퀴벌레' 같다느니,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의 조직' 같다느니 하는 유치한 경우도 있고, 모범적인 생활을 국영방송 NHK에 비유하여 마치 "NHK 같다"라는 둥 매우 불친절하고 공감도 쉬이 안 가는 비유를 무리하게 끌어쓰는 모습도 보입니다.

대사가 후지다는 건 어떻게든 작가의 나이를 감안해서 넘어가줄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장르가 스릴러에 가까운 이상, 서스펜스가 극대화되는 고비마다 '그때 뒤에서 XX가 OO를 불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식의 수법은 너무 구닥다립니다. 무슨 몇백 년이나 묵은 고전소설도 아닌데 말이에요. 게다가, 초반부에 오빠가 사체 유기에 그토록 쉽게 가담한다는 건 정말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야, 억지를 쓴다면 그 빈 공간은 독자 나름대로 상상해서 메울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사체를 눈 앞에 둔 오빠의 재빠른 판단은 어린 아이라기보다도 범죄 프로페셔널의 자세에 가까워요. 이건 치명적입니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추락사한 사체를 앞에 두고 이렇게 대처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이 점에 있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립습니다. 최소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는 극단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꽤 공을 들이고, 그 결과 또한 상당히 성공적이거든요. 물론, 제가 오츠이치에게 히가시노 게이고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사체를 보자마자 유기를 결행하는 건 너무했어요. 두세 페이지 정도만 할애했어도 비교적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차라리 뒤쪽에 덤으로 실린 '유코'가 훨씬 좋습니다. 병적인 설정에서 호러를 꽤 맛깔나게 살릴 줄 알더군요. 약하기는 하지만 반전도 있어요. 다만, 마지막 장에서 반전을 너무 친절하게 설명하느라 말이 많아지긴 합니다. 갑자기 연극적으로 과장된 대사가 난무하는 것도 약간 당황스럽긴 하지만, 병적인 분위기와 이질적이진 않으니까,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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