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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의 바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최소한 온다 리쿠에 관해서라면 북폴리오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밤의 피크닉>, <삼월은 붉은 구렁을>,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흑과 다의 환상>, <황혼녘 백합의 뼈>. 나야, <황혼녘 백합의 뼈>에 와서는 약간 미끌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북폴리오에서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로 미즈노 리세 시리즈의 포문을 연 이상, 후속편 역시 북폴리오에서 내는 게 비교적 온당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렇게 둘을 미즈노 리세 시리즈라는 하나의 거대한 묶음으로 생각한다면, 북폴리오의 안목에는 더이상 토를 달 여지가 없다. 북폴리오가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해왔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북폴리오 : 6편, 국일미디어 : 4편, 노블마인 : 3편, 랜덤하우스 : 2편, 비채 : 1편, 북스토리 : 1편), 그야말로 접입가경이 아닌가.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번에도 북폴리오의 선택은 옳았다. 얼마 전 <불안한 동화>와 <구형의 계절>에서 폭거를 저지른 바 있는 랜덤하우스를 향한 분노, 아니 그 단계를 넘어, 허탈하고 피폐한 마음은, <도서실의 바다> 한 권으로, 잠시 한수 접어둬도 괜찮을 듯 싶다.
한 권 250p에 단편이 열. 여태껏 한국에 출간된 온다 리쿠 도서 중 볼륨도 가장 얇은 주제에, 한 권이 품고 있는 이야기의 수는 가장 많다. 게다가 도코노 연작을 제외하면, 온다 리쿠의 작품이 한국에서 단편소설의 형태로 소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의외로 잠재적 불안 요소가 꽤나 많았던 것이다. 사실, 일단 덥썩 사긴 했지만, 나도 읽기 전에는 반신반의 정도였다. 그야, 앞서 미리 결론을 말해버렸듯, 모든 게 단지 기우에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도서실의 바다>에 실린 열 편 모두, 독자가 단편소설에 기대하는 기본기 정도는 가뿐하게 해치우기 때문에, 내게 개중 후진 소설을 찾으라는 요구를 한다면, 상당히 망설이게 될 것이다. 다만, '피크닉 준비' 같은 경우, <밤의 피크닉>의 주요한 갈등 구조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짧막한 글 안에 담긴 감성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밤의 피크닉>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는 무리이다. '수련'이나 '도서실의 바다'는 각각 미즈노 리세 시리즈와 <여섯 번째 사요코>와 연결되지만, 충분히 독립적인 단편으로 기능하므로, 굳이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물론, 예전부터 온다 리쿠를 읽어왔던 독자들에게는, 기존 세계의 새로운 연장선상에서 또 잠시나마 신나게 놀다 갈 수 있는 놀이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소설들도 각각 SF,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등, 장르는 이질적이다만, 꽤 밀도있는 문장을 주축으로, 감성의 터치가 짙게 묻어난다는 점에서 썩 만족스러운 단편들이었다.
고작 10p 분량에 그치지만 '오디세이아'는 갖은 낭만을 매우 압축적으로 전달해 준, 그야말로 환상적인 단편이었다. 장대한 세월의 압도적 존재감을 단어 몇몇에 가볍게 묶어낸 후 막힘없이 쏟아내는데, 머릿속에 그려지는 세계는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팽창해간다. 여전히 세 달이나 더 남아 있다만, 올해 들어 나를 가장 설레게 만든 단편 소설로 미리 뽑아둔다 하더라도, 뒷날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온다 리쿠님, 앞으로도 종종 단편 소설집을 기대해도 될까 모르겠어요. 물론, 매번 '오디세이아'처럼 얼핏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소품 같으면서도, 임팩트는 웬만큼 잘쓰여진 장편소설보다도 뛰어난 수준을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긴장하실 건 전혀 없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