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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히틀러 ㅣ How To Read 시리즈
닐 그레고어 지음, 안인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우스갯소리나 저급한 농담으로 시간을 죽이는 용도라면 몰라도, 간혹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사실은 히틀러가 미친놈(혹은 게이, 여자, 유대인 등등)이라서...(후략)"라는 말이 나오면 왠지 조금 씁쓸한 기분에 빠져든다. 마치 누군가가 최근 인간 관계에 얽힌 고초를 털어놓으며 "나는 XX를 정말 싫어하는데...(중략)...아, 글쎄 그 인간이 B형이거든!"라고 말하는 걸 들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꽥 지르며 "당신은 지금 몇 가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라고 조목조목 짚고 넘어가고 싶지만, (원만하게 보이는) 인간 관계야말로 실로 중요한 것이므로, 이런 하찮은 욕망쯤은 적절히 억누를 줄 알아야 양식 있는 현대인이라 할 수 있다(님하, 정말 -_-?).
각설하고 - 그러나 헛소리는 여전히 계속된다 - 양자를 포괄하는 요는, 그러니까 한 인간을 개똥 취급하는 데에도 충분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게다. 최소한 나, 혹은 당신이 어떤 '무언가(특정 개인이나 집단 외 아무거나 좋다)'를 정신없이 씹어대는 행위는, 은근히 그 '무언가'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다(아무런 힘도 없는 찌질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무시'이지 '분노'가 아니다). 한 인간으로부터 매우 격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건, 그 나름대로 에너지와 상당 기간의 세월이 요구되는 일이다(물론 천부적으로 사람을 괴롭힐 줄 아는 존재들도 있다만). 따라서, 그 '무언가'가 우리 안에 심어놓은 독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다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준비가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그냥 "미친놈이라서" 앞서 언급한 XX가 "B형이라서" 그런 거라며, 안이한 태도로 대처하고 넘어간다면, 언제가 또 다시 그 독에 당할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간의 관계에서나, 아니면 좀 더 거대한 스케일의 관계에서나,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접근법이 필요한 것이다. "조국과 민족의 영광된 민주화를 위하여"나, "교양 있는 지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마디로 누가 나를 엿먹이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다. 매우 거칠고 형편없이 요약하자면, <HOW TO READ 히틀러>의 기본 전략이 이와 비슷하다.
저자 닐 그레고어도 고백하듯이 <HOW TO READ 히틀러>에서 독해 텍스트로 삼은 <나의 투쟁>과 <제2권>는 삼류 팜플렛에 불과하며, 히틀러에게는 일관되고 깊이있는 철학이나 논리가 없기 때문에, 이를 독해한다는 게 칸트나 마르크스를 읽는 것처럼 고상한 행위는 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히틀러가 현대 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거대하다. 따라서, 그저 "히틀러는 정신병자"라는 빈약한 논리밖에 펴지 못 한다는 것은, 히틀러 이후의 시대를 사는 독해자로서 매우 안이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HOW TO READ 히틀러>에서 <나의 투쟁>과 <제2권>을 집요하게 파헤쳐, 주제에 따라 수많은 발췌문을 고르고 이에 꼬박꼬박 분석을 가하는 닐 그레고어의 성실한 자세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를 떠나서라도 본받을 만하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에 이어 읽는다면, 의도주의자(↔구조주의자)들의 견해를 좀 더 보강하는 차원에서 썩 유익한 독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HOW TO READ 히틀러>에서 가장 볼 만한 장면은 마지막 부분에 와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독해자로서의 닐 그레고어'와 '독해자로서의 히틀러'가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히틀러 또한 상당한 양의 정보를 습득한 독서가였지만, 대중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지식을 쌓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가, 대부분 자신의 선입견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불명확하고 비판적 분석이 전제되지 않은 독서를 거듭했을 뿐이다. 이를 닐 그레고어가 <HOW TO READ 히틀러>에서 <나의 투쟁>과 <제2권>을 대하는 전략과 대조해 보는 작업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