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의 계절
온다 리쿠 지음, 임경화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데뷔작 <여섯 번째 사요코> 이후 두 번째로 쓴 소설이라고 들었다. 물론 <구형의 계절>과 <여섯 번째 사요코>의 세부 장르는 엄연히 다르다만, 두 편 모두 주역들이 학생인 데다가, 학교가 중요한 배경이 되며, 집단 내부의 오컬트적 사건이 주된 소재로 이용되는 등, 공통 분모도 꽤 찾을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선에서 비교도 가능하다. 또한 내게 온다 리쿠는, 소설 속 인물들의 외모, 성격, 대사를 통해 무언가 - 문화 활동 외 인생관까지 - 에 대한 취향이나 감상을 꽤 단호하고 확고하게 짚고 넘어가길 잘 한다는 인상이 짙다. 게다가 온다 리쿠는 이렇게 하나둘 쌓여가는 주관적 정보를 무용하게 낭비하는 일 없이, 작품의 방향성 외 플롯을 짜는 주요 아이디어와 밀접하게 연관시켜 싸그리 이용하길 선호하는 편이므로, 쓰여진 시기와 소설 속 배경, 주인공들이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몇몇 작품을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이지면, 국내에서 <밤의 피크닉> 이후 출간되는 온다 리쿠 소설들을 두고 몇몇 독자들은 "만날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면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1/x로 압축시킬 수 있다"라고 투덜대는 것도 앞서 내가 말한 바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분명 내가 보기에 이 작가는 애초에 이야기를 경제적으로 쓰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1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소설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래도 일단 명색이 작가인데, 옮겨적은 단상의 파편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여 만들 필요는 있으니, 그 잡담을 포괄할 수 있도록 플롯을 좀 더 촘촘히. 또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스케일에 비해 분량은 굉장히 커지기 마련. 한마디로, 내게 온다 리쿠는 '경제적 글쓰기'를 우선하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로망 보따리(?) 안에 담긴 물건을 모조리 소설 안에 배치한다는 목표 하에 그나마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를 찾는 작가이다.

이곳이 바로 온다 리쿠란 작가를 좋아하고, 또 싫어하게 되는 갈림길이 아닐까. 이렇게 소설 구석구석 빼곡하게 묻어난 온다 리쿠의 색이란, 본래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독자들이 아니고서야, 신나는 마음으로 읽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한 독자들에게 소위 온다 리쿠의 장점이나 특기라 불리는 것마저 약점으로 쉽게 전환된다. 이제 온다 리쿠 앞에 붙는 상투적 수사가 돼버린 '노스탤지어의 전령'이란 말은 온다 리쿠 - 만약 이 표현이 불편하다면, '온다 리쿠가 창조한 등장인물'로 바꿔도 무방하다 - 와 비교적 유사한 가치관을 지닌 독자들에겐 실로 높은 동조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그 모든 것은 "쓸데없이 말만 많은 군더더기"이며, 얼핏 비슷비슷해 보이는 -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이란 시간에 따라 서서히 변하므로 - 군더더기가 잔뜩한 동일 시기의 작품군을 "그 나물에 그 밥"으로 규정할 만한 근거로 쉬이 모습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권위도 뭣도 없는 일개 독자의 철저한 사견에 불과하므로, 이를 굳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는 전혀 없다)

어디까지 얘기했던가. 그래, 원래 하려던 말은 "<구형의 계절>은 <여섯 번째 사요코>에 이은 두 번째 소설이면서도 꽤 발전된 모습이 돋보인다"였다. 그러나, 이런 발언에는 장르가 엄연히 다른 두 소설을 몇몇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하고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으므로, 이를 설명하지 못 한다면, 애초에 <여섯 번째 사요코>를 운운하는 것 자체부터 오류인 것이다. '아아, 이런'이라며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어느 새 본론보다 긴 분량의 '본격 삼천포' 완성(ㅠㅠ)

각설하고, 그럼 이제 <구형의 계절>을 이야기하자. 앞서 말했던 대로 <구형의 계절>은 <여섯 번째 사요코>보다 성숙해 보인다. 당장 <여섯 번째 사요코>의 마지막 부분만 해도, 과연 작가가 추구하는 바는, 작품 내적으로 완벽하게 귀결되는 '세계의 수렴'인지, 아니면 결말 외 소설의 일부분을 독자의 끝없는 상상에 맡긴 채 열어두는 '세계의 발산'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소설의 구성도 그리 탄탄하지 못 하며, 방향성 또한 일관적이지 못 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중간의 '여섯 번째 사요코'란 연극이 노린 효과가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많은 결점이 가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에 비해 <구형의 계절>은 확고한 열린 결말을 노렸으며, 다행스럽게도 소설 속 세세한 장치들도 꽤 일관적인 쪽으로 작동한다.

다만, 중간중간 새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타 온다 리쿠의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많은 편이라, 소설을 한참 읽고 나서도 작품의 구심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난잡하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 속 배경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며 작품의 구심점이 된 <유지니아>는 애초에 사건의 결말을 확연히 제시해 두고, 화자를 바꿔가며 서술하기 때문에, 작가의 노림수는 이야기의 불확실성으로 쉬이 귀결된다. 하지만 <구형의 계절>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숨기고 시작하는 미스터리의 전형적 이야기 방식을 차용하면서도, 절반이 넘어가도록 등장인물의 수와 더불어 엔트로피 역시 계속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니, 당연히 난잡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형의 계절>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습게도 일종의 오컬트적 요소 때문인데, 바로 얼마 전 <불안한 동화>는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일면 점수가 깎였으니, 은근히 재밌는 일이다. 결국 이 차이는 순전히 두 소설의 장르와 오컬트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불안한 동화>는 어디까지나 범인을 찾는 데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본격 미스터리에 가까운데,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 '환생'이나 '생각 읽기' 따위의 오컬트가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컬트가 갈등 해소의 주된 도구로 이용되는 셈인데, <불안한 동화>에는 독자에게 오컬트의 존재를 그럴 듯하게 납득시키는 과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애초에 오컬트를 전혀 믿지 않는 독자들에겐 "거의 빵점"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형의 계절>은 민속학과 획일적인 교육에 찌든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불안한 심리, 판타지 등을 버무려, 오컬트 현상을 꽤 그럴 듯하게 파악하려 드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이 성과가 세밀한 감정묘사와 맞물리며, 소설 속 세계 전반에 더 짙고 더 무거운 억압으로 작용하는 마지막 장은 특히나 볼만 했다.

ps. 표지, 띠지, 인쇄, 번역, 이렇게 네 부문에 걸쳐 빼곡하게 투덜대다가, 이걸 쓰고 있는 제 자신이 몹시 피폐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모조리 지워버렸습니다. 아무리 까는 게 재미있다고 해도, 세세한 차이만 있을 뿐, 전반적으로 동어반복에 가까운 소리를 집중적으로 세 번이나 한다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아요. 까는 게 신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슬슬 좋은 소리도 좀 더 많이 하고 싶었고요. 분명 <구형의 계절>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얼마든지 기뻐하며 맞아줄 수 있지만, 그 일본산 소프트웨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 그리고 번역된 내용물을 담은 '하드웨어'의 저질스러운 수준이란,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차마 감내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불안한 동화>는 표지에 그쳤지만, 이번에는 더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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