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그와 눈이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최면을 건 후, 계산대를 훌쩍 넘어가 그를 붙잡고 어두운 골목으로 가려고 시도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을 벌린다면..나는 뱀파이어 경찰들에게 잡혀가 처형될 것이다. 얼마전에 몸소 경험한 그들은 우리가 인간들에게 들키면 안되다는 조약을 지키기 위해 밤이면 서울을 돌아다닌다. 사실, 우리의 법이란게 수십개의 조항이 있지만 딱 한마디로 요약하면 “절대 인간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지 마라”이다. 이걸 요렇게 포장하고, 저렇게 늘려서 길게 늘어논 게 법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뱀파이어로 변신한 후 눈을 뜨면 교육을 받는다. 인간을 똑바로 쳐다보지 마라, 인간보다 빨리 달리지 마라, 송곳니를 숨겨라 등등...나는 스승님에게 하나하나 전수받았다. 그런데 몇 달 전에는 그런 교육을 못 받은 듯한 뱀파이어가 인간들을 사냥하는 문제를 일으켰고, 하필이면 내가 피 흘리는 인간을 발견하여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다. 덕분에 절대로 인간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매니저는 3시가 되자, 매장을 마무리 한 후, 한 사람씩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내 차례가 되어 약간 묵직한 듯한 느낌을 전달받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이걸로 피를 사면 보름 동안은 굶지 않아도 되니까.. 

[민시영씨]
[네?] 

행복한 기분에 감싸여 문쪽으로 몸을 휙 돌리는데, 등 뒤로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몸을 다시 1/3쯤 회전시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안아도 됩니다]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완전히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5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아...니..내일..시간 잘 지키라고..] 

[알겠습니다. 내일 뵈요] 

뭔가 말이 꼬이는 듯 머리카락을 손으로 툭툭치며 겨우 입을 닫은 매니저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제야 그녀에게 썼던 뱀파이어식의 매력을 거두고 매장을 나왔다. 물론 내가 직원으로서 상당히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이나마라도 돈을 벌지 못하면 쥐꼬리 만한 장애수당으로 5일 정도만 피를 마시고 나머지는 굶어야하니 별 수 없다, 짤리지 않으려면. 나는 아주 잠깐 매장을 바라본 뒤 뱀파이어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왕복 8차선 도로 너머의 시계탑은 어느새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기억에 오늘은 해가 6시 37분에 뜰 예정이라 약간 여유는 있지만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젠 배가 너무 고프고, 시큰거리던 눈이 뽑아져 나갈 것처럼 쿵쿵거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삼차신경통이 오는 모양이다.
 

_______ 

 

 시계탑을 지나 3개의 골목을 지그재그로 통과하니 농민생협조합 간판이 흐릿하게 보였다. 간판을 비추는 전구들이 수명을 다해가는지 한개는 이미 꺼졌고, 그 옆에 것은 흐려지다, 밝아지다를 춤추듯이 되풀이 하는 중이다. 나는 피를 살수 있다는 기분에 살짝 콧웃음을 치며 욱씬거리는 눈을 두들겼다. 송곳니가 나오려고 간질 간질 한 잇몸을 혀로 견드리며, 편의점의 손잡이에 손바닥을 붙였다. 이 편의점은 인간이 보면 농민생활협동조합 소속의 유기농 상점이지만, 뱀파이어에게는 혈액 공급 편의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뱀파이어 인식 시스템을 거쳐야 한다. 누가 고안해 냈는지는 몰라도, 참 놀라운게 손바닥을 붙이면 작은 침이 표피를 찔러 피를 가져간다. 그 한방울을 중앙제어 시스템에 보관중인 피들과 비교하여 어느 뱀파이어인지 알아내고 들여보내 주는 것이다. 매번 느끼지만 과학이란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인간들의 과학은 아직 우리보다는 느리지만, 곧 그들도 이런 시스템을 만들지 않을까.. 

[어서오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뱀파이어가 웃으며 환영인사를 했다. 그녀는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올렸다, 내렸다 하는 식으로 매번 희안하게 바꾸는 여자로, 오늘은 검정 바탕에 붉은 매화가 그려진 비녀를 5개나 꽂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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