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건물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폐에 들어 있는 공기를 모두 빼내고 입을 닫았다. 진공 상태로 만들어 건물 안의 나쁜 공기와 폐가 접하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들어가기 전에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몸 위쪽으로 감싼 뒤 양 끝을 적당히 묶어버렸다. 최대한 문소리가 나지 않게 들어 올린 후 잡아당겨 몸이 지나갈 만큼만 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벽을 등지고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머릿속에 다시 전파가 흐르기 시작했다. 파도가 바위를 때리고 물러가는 것처럼 지지직거리는 음파와 흐릿한 중얼거림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그 소리가 커지는 쪽을 향해 방향을 꺾었다. 발을 따라 피어오르고 퍼져나가는 먼지가 최정점에 달할 무렵, 손잡이 같이 길쭉한 막대기가 손에 잡혔다. 위 아래로 더듬어보니 잡아당기면 열릴 것 같다.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 두려워 아까처럼 들어올린 후 당기려고 했더니 엄청난 무게의 문인지 들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소리가 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다행스럽게 문은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 문 안으로는 회색에 가까운 등이 점점이 있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의 모습이 쉽게 식별되었다. 계단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신고 있는 하이힐이 돌계단을 내려갈 때 또각 거리는 소리를 내, 뒤꿈치를 들었다.
계단은 둥글게 휘어지는 느낌으로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고, 종아리가 저릿한 느낌이 들 무렵에야 겨우 바닥이 평평해졌다. 들고 있던 뒤꿈치를 내리고 허리를 주먹으로 때려 몸이 결리는 걸 푸느라 몇 분 쯤 허비한 후,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웅성거리던 소리들은 더욱 강하고 분명해졌지만, 아직도 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 판단이 서질 않아 조용히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계단이 끝나고 바로 연결된 복도는 미로처럼 구불거렸다. 몇 미터쯤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거나 왼쪽으로 휘어져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 혼동이 될 정도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갈림길이 없다는 점이다. 계단이 끝나고 5-6번쯤 커브를 돌았을 때 처음으로 오른쪽 방을 볼 수 있었다. 나무로 성기게 만든 문이 달려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조금 벌어져있는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려고 얼굴을 바짝 붙였다. 나무 틈새가 크지 않아 방 전부를 꼼꼼히 둘러보긴 어렵지만 대략 눈에 들어오는 건 2평정도 되는 넓이로 직사각형 모양이다. 창문이 없고 주황색 불이 천장에 하나 달려있는 게 다인 매우 간소한 방이다.
첫 번째 방에는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 허리를 펴고 좀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복도는 걸어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네 번째 방에 도착할 때쯤엔 성인 남자 2명도 나란히 지나가기가 애매해졌다. 만약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도망치기도 곤란할 넓이인데 아직까지 아무하고도 부딪히지 않음을 감사해하며 네 번째 방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뱀파이어가 있었다. 쇠사슬로 팔 다리를 묶여 벽에 고정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사람이 아님을 안 이유는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뱀파이어로 변했을 때, 배운 것 중 하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뚝을 박으면 영화에서처럼 재로 변해 소멸할 것이라 믿지만, 실재는 그렇지 않다. 심장에 정확히 박히면 그 순간부터 잠이 든 것처럼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뇌사상태에 빠진다. 이 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야만 우리는 영원히 사라진다. 반대로 뇌사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말뚝을 뽑자마자 분수 같이 터져 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고 상처를 재생시킬 수 있도록 아주 강력한 피를 흡혈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강력한 피..그것은 또 다른 뱀파이어의 피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건 말뚝이 뽑히고 다시 움직이게 되면 그 뱀파이어는 본능이 앞서 상대가 누구든 죽을 때까지 피를 마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