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벽에 기대어 몸을 돌려보니 190센티는 되보일 정도의 남자가 나를 향해 서 있었다.
[화장실을 찾으려고요. 건물들이 모두 잠겨 있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도데체 화장실이 있기는 한건가요?]
그는 잠시 동안 생각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이 있는 지점쯤에서 흔들었다.
[손이 더러워져서 냄새가 나는데 홀은 초만원이고 화장실을 찾아 여기까지 오게 하다니.무슨 파티를 이렇게 해요?]
신경질적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지만, 스승님에 대한 화가 덜 풀렸는지 목소리가 점점 히스테릭해졌다. 그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것 까지는 없고, 어딘지만 가르쳐주세요]
나는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는 나를 인도해 현관문 밖으로 나온 후,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가다가 두 번째 붉은 건물이 나오면 옆문이 열려있다는 말과 함께. 그는 자신이 가르쳐준 데로 가는지 나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돌길이 굽어지며 그를 볼 수 없을 때가 돼서야 숨을 몰아쉈다. 그의 말대로 두 번 째 붉은 건물은 옆문이 열려있었다. 그 곳으로 들어가자 작지만 복도를 충분히 비춰주는 등이 곳곳에 있어 화장실을 쉽게 찾았다. 물을 틀어 손을 씻고 입을 행군 후,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니, 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머리카락도 많이 흘러내려 전체적으로 창피스러웠다. 물을 묻혀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 온 후의 일을 되짚어 보았지만 스승님의 비밀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그러나 내가 잘 아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화장실을 나와 붉은 건물을 벗어났다. 환하고 뱀파이어들로 북적이는 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데 오른쪽 정원의 으슥한 곳에서 어떤 여자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남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여자는 쥐가 지나갔다고 대답했다. 그 때 갑자기 팍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프릭스들. 그리고 회색의 숲. 그들이 한꺼번에 떠들 때 머리 속을 흐르던 해일 같은 전파들.
아까 그 건물에 들어갔을 때 바로 그런 느낌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흰색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곳에 그들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전파가 머릿속을 떠돌 수가 없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어디 가지 말고 이 안에 있어]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걸까? 혹시나 이 저택에 스승님과 RRS가 움직여야만할 일이 있는 걸까? 그레고리는 그것을 의심한 걸까? 나는 주먹을 쥐고 땅을 발로 툭툭 치다가 뒤돌아섰다. 흰색 건물에 다시 가봐야만 할 것 같다. 가서 그들이 정말 있는 건지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