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고 하는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하긴, 제가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아서 읽어보실 텐데 더 말해 뭐하겠어요]
[민시영!] 

귀가 울릴 만큼 큰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늘어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스승님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말 하지 못한 건 미안해. 내가 가진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네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우리 관계가 깊어졌을 때 말하려고 했어]
[언제요? 제가 스승님의 여자가 된 후에?] 

스승님의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 하려는데 끈질기게 울리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나를 놓아주고는 전화를 받았다. 1분여쯤의 통화 후에 차 문을 열고 내리다가 다시 상반신을 구부려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어디 가지 말고 이 안에 있어. 꼭!] 

나는 팔짱을 끼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승님은 그런 나를 잠시 보다가 문을 닫고 주차장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이제는 술 때문에 속이 아프다기 보다는 스승님께 속았다는 사실이 속을 더 쓰리게 한다. 내가 스승님을 바라보면서 했던 상상들도 다 알고 있고, 프릭스와의 아슬아슬한 감정도 적나라하게 들겼다는 게 마치 옷을 벗고 스승님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욱] 

속이 뒤틀리는 증상과 함께 아까 마신 술의 알싸한 향이 코에서 느껴졌다. 이어서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액체 때문에 입을 틀어막고 차에서 내렸다. 뛸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멀리 갔다. 주차장을 거의 벗어났을 때 쯤, 막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결국 누군가의 차 옆에서 계속 게워냈다. 내 속엔 단순히 술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스승님에 대한 복잡한 마음도 위액에 섞여 나오는 지 쏟아도 쏟아도 뭔가 남아있는 듯 불편하기만 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네. 그냥 술을 좀 많이 마셔서요] 

누군가의 말이 머리 위에서 들리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슴을 문지르던 손을 들어 괜찮다고 흔들었다. 그 누군가는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몇 번 등을 문질러주고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손에서 위액 냄새가 시큼하게 나고 입 안에서는 술 냄새가 맴돌았다. 입을 행구고 손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10여분 쯤 멍청히 있다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홀이 보이는 건물로 천천히 걸어갔다. 홀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웃음 소리와 작게 속삭이는 대화들이 귀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런 상태로 들어간다면 후각과 청각이 뛰어난 뱀파이어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겠다 싶어 몸을 돌려 건물 옆의 돌길로 들어섰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걸어갈수록 건물을 밝혀주던 주황색 등불들이 사라지면서 어둠이 깊어졌다. 홀을 빼고는 건물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잠시 동안 그냥 돌아갈까 고민을 하다가 옷매무새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오른편 건물의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손으로 현관문을 밀었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고, 그 옆의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이 저택에는 건물이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은지 돌길을 걸어갈 때마다 새로운 건물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매번 무겁고 육중한 현관문들은 굳게 잠긴 채 나를 거부했다. 숲처럼 울창한 나무들이 양쪽에 심어져 있는 길의 끝에는 담장이 쳐 있어 더는 갈 곳이 없겠다 싶었을 때, 나지막한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곽까지 장식이 요란하고 웅장한 다른 곳들과는 달리 허름하고 단순하며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나무들에 가려있어 과연 문이 열려 있기나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가가 확인하려고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끼이익] 

예상과 달리 문이 힘들게 열렸다. 소리가 약간 귀에 거슬렸지만, 열려 있다는 점만으로도 감사하다. 들어서는 순간 어둡고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오면서 살짝 열어둔 현관문의 외줄기 빛이 바닥에 조금 비추긴 하지만 벽과 그 주변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 왼쪽부터 벽을 더듬어 가는데 점점 머리 속이 시끄러워졌다. 수많은 전파가 지지직거리는 듯 한 느낌이 뇌를 흔들어 속이 다시 메슥거렸다. 게다가 이 곳은 청소와 담 쌓았는지 손에 먼지가 잔뜩 묻고 숨을 쉴 때면 코가 간질 간질거린다. 

[에취] 

참으려고 실룩거리기만 하던 코와 입이 크게 움직이며 기침이 나왔다.  

[누구십니까?] 

내 어깨에 갑자기 닿는 손의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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