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음에 남아 있잖아요] 

내 말에는 어떤 가시도 돗혀있지 않지만, 스승님은 내 얼굴을 잠시 살피셨다. 무엇을 찾는 걸까? 나는 이 순간 어떤 얼굴로 스승님을 대하고 있는지 거울을 보고 싶다. 

[너 질투하냐?]
[네? 그게 아니라..]
[다왔다. 내리자] 

내가 반론을 막 제기하려는데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스승님은 조수석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주시며 내가 아름답고 우아하게 내리도록 손을 잡았다.  

[숄을 가져가야할까요? 뭔가 좀 부족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차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모든 게 낮설고 처음 같아 백은 어떻게 들어야할지, 어느 발부터 내밀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정쩡한 포즈로 숄을 꺼낼까말까 망설이는데 스승님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자신의 몸 쪽으로 잡아다녔다. 살짝 그의 몸에 내 가슴이 닿을만큼 가까워지자 그는 나머지 손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숨을 들이킬 때, 그가 바른 에프터쉐이브의 향이 함께 들어와 침을 꿀꺽 삼켰다.  

[넌 매우 아름다워. 숄 같은 건 잊어버려] 

귀에 속삭이듯 들어오는 말에 전율같은 소름이 발끝부터 밀려들었다.  

[오랜만이군] 

귀에 기분 나쁘게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우리차 너머에는 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미녀를 꿰어찬 40대의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쇠가 갈리는 느낌을 동반하고 있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청신경이 쨍쨍 울렀다. 스승님이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남자는 미녀와 함께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의 낮선 눈이 나를 훑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취향이 바뀐거 같군] 

그는 내 오른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살짝 입술을 댔다. 허리에 감은 스승님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인사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낮선 뱀파어의 눈은 나를 먹이감으로 보는 것처럼 붉은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그는 잠시 동안 내 눈을 바라보다가 스승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그레고리, 늦겠어요] 

금발의 미녀가 속삭였다.  

[모두 변하기 마련이니까. 만나서 반가웠어] 

스승님은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지 차갑고 간단하게 말한 뒤 나를 이끌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레고리..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누구에요?]
[과거에 좀 알았던 인물] 

굳어진 얼굴 표정으로 보아 더 물어봤자 마음에 들게 대답할 것 같지 않아 작게 한숨을 쉬고 발길을 재촉했다. 주차장은 건물 옆에 붙어 있는데 차를 100대 넘게 주차시킬 수 있을 만큼 커서 깜짝 놀랐다. 실재로도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벌써 83대였다. 주차장이 이정도 규모면 다른 곳은 더 굉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쯤 걸어가자 경계선 위에 마련되있는 문에 눈같이 흰 백합과 커다란 카라들로 장식된 아치가 서 있었다. 밤이건만 그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향기는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어떻게 꼬이고 엉켜 멋진 모습을 보이는 건지 눈으로 따라가다보니 바닥의 경계선 지점이 튀어 올라와 있는 걸 미처 보지 못해 발을 찧을뻔 했다. 

[고맙습니다] 

내 발에 불상사가 생길 찰나에 나를 끌어당겨주신 스승님께 웅얼웅얼 인사를 하면서 몸을 떼고 아치를 붙잡았다. 발끝을 덮고 있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경계선을 넘어 풀밭 위에 올라섰다. 스승님이 내민 손을 잡고 풀밭을 걸어가면서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길목마다 서 있는 고전적인 등불이 옅은 주황색으로 빛나며 코를 중심으로 음영을 만들어주니 미술시간에 본 그리스 인물 조각같다. 손으로 내 코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확인해볼 것 없이 상당히 낮고 뭉특하다. 뱀파이어가 되고자 결심했을 때 가장 원했던 게 바로 오똑한 코를 갖게 되는 일이었는데 결국 똑같은 외모이고 보니 스승님을 올려다볼 때면 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 왔다] 

스승님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며 나를 내려다보셨다. 눈이 마주치자 창피함이 수면으로 떠올라 입술을 뽀족하게 말았다. 그런 내 모습에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우리 뒤에서 출입문으로 들어가고자 기다리는 다른 커플들 때문에 결국 입을 열지 않으셨다. 

[와...] 

촌스러워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키의 두 배쯤 되는 출입문을 지나자 내 삶에서 본 중 제일 큰 홀과 마주쳤다. 천장도 그 위용이 엄청났다. 출입문을 3개 이상 쌓아올려도 닿지 못할 높이에 반원형의 천장이 덮혀 있는데, 빼곡히 물방울 샹들리에가 긴 줄에 매달려 있어 살짝 살짝 흔들리며 반짝거린다. 벽면에는 이 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알 수 없게 그리스풍 조각들이 부조로 웅장하게 세겨져있어 하나하나 신경써서 보려면 아마 목이 빠질 것이다. 과연 정부 관료의 칵테일 파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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