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맘때는 내가 어떤 결정을 할 필요가 없이 먹으랄 때 먹고, 공부하랄 때 책만 파면되니 책임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내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어야만 한다. 토끼였던 에스더를 두 번째로 내 영향력 아래에 두고보니, 그 책임이라는 말이 묵직하게 가슴에 자리를 잡아버려 그녀가 집단에서 쫏겨날 경우의 거취 문제가 내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와!] 

창문가에 앉아 내가 조금씩 파티에 갈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본 프릭스들이 감탄한다. 뭐, 나도 꾸미면 그렇게까지 못난이는 아니니까 그런 반응에 내심 기분이 나아졌다. 

[조금 더 아이세도우를 바를까? 어때?] 

말 없이 방글거리는 에스더에게 물었다. 

[지금 정도면 충분해요. 제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마타님이에요. 숄만 하나 가져가시면 딱이에요] 

혼자 준비하던 걸 그녀가 하나하나 코치해줘 오히려 빨리 준비가 끝났다. 그들은 뱀파이어의 파티가 매우 궁금한지 따라가고 싶은 눈치지만, 그곳에 누가 올지 알 수 없어 모른척했다. 하지만 나도 속으로는 들뜬 기분이었다. 스승님과 함께 산 이래로 정부 관료가 주최하는 칵테일 파티는 가본 적이 없어 무지 궁금하다.  

[나 그만 내려갈게]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백과 숄을 들고 문을 열었다. 그들의 작은 목소리가 재미있게 놀다오라고   응원을 보내왔다. 

 


[제가 실수하면 어떻하죠?]
[내가 옆에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BMW를 운전하는 스승님 옆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우리는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청력이 있어서 그 역시 숨 소리 정도의 크기로 대답했다. 

[그 여자분과 가지 그러셨어요?]
[누구?]
[주민자치센터의 안내양말이에요]
[아...제이]
[그 여자분 이름이 제이에요? 이름을 알 정도면 아주 친하신가봐요?]
[음..뭐..그럭저럭] 

대답이 애매해 기분이 나빠졌다.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산데다가 상당히 매력적이니 친한 여자가 있겠지만, 특히나 그렇게 섹시함을 온 몸에서 폴폴 풍기는 이성이 옆에 있다면 곤란하다.  

[왜 그여자분과 같이 안갔어요?]
[제이가 다른 사람과 가니까]
[역시..그런 거였군요]
[농담이야. 처음부터 너와 갈 생각이었어] 

나를 힐끔 쳐다보는 표정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말 한 마디에 가슴이 곤두박질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게 화가났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자와 내가 비교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걱정이 앞섰다. 

[제이는 그냥 친구야. 아주 오래되서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그런 사이] 

내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앞만 바라보자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신다.  

[손님방에 묶었던 분은요? 그분도 친구였나요?] 

충동적으로 내뱉은 질문이 끝날 무렵, 핸들을 죈 스승님의 손에 힘이 들어가 손 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1분 정도 정적이 흐른 후, 아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파티장까지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온다. 스승님의 운전 솜씨야 매우 훌륭해 조수석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차 안의 묵직한 공기가 나를 눌러 빨리 내리고 싶었다. 손님방의 여자에 대해 말을 꺼내지 말껄..하는 후회가 머리 속에서 맴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 모두 과거다. 지나간건 신경쓰지 말아라. 써니는..다시 볼 일 없는 여자야] 

써니..태양처럼 눈부신 여자일까? 지금도 기억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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