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피부가 나보다 더 좋은데..말이 안되잖아요]
[이정도면 나도 많이 늙은 거야] 

새벽이 아침으로 바뀌어가는 걸 몸이 아는지 점점 눈이 무거워졌다.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 꾹 눌러가며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스승님은 내가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셨다. 

[가족들이 그리우세요?]
[응. 뱀파이어가 되었어도 인간이었을 때를 완전히 잊는 건 아니니까. 난 아직도 어머니의 부드러운 입술을 기억하는 걸]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머릿속에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며 웃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의 부드러운 손길도. 스승님의 어깨가 베게 같아서일까, 눈 앞에 붉고 검은 장막이 서서히 떠오르며 참고 참았던 졸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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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어 눈이 자동적으로 떠지자마자 집을 나섰다. 밤바람이 쌀쌀할 것 같아 들고 온 망토 모양의 가디건을 단단히 고쳐 매고 길거리를 뛰어갔다. 내 기억으로 이 길을 1시간쯤 달리면 목적지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 이렇게 무작정 가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보지 않으면 살아가는 내내 후회할 것이다. 나는 영원한 세계 속에 있지만 그들은 곧 죽을 테니까.  

오래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내가 걸어가는 길을 둘러보았다. 다국적 기업이 장악해버린 코비 편의점이 골목마다 있고, 각종 3D 게임을 할 수 있는 감각 휴게방이 24시간 영업 중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을 보자니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처럼 그들도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거나 나를 잊었을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내가 뱀파이어가 되던 그 순간부터 그들의 시간과 내 시간이 달라졌을 테니 무작정 그들을 보러가는 게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처음에 빠르게 달려가던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의 속도로 골목길을 걸어간다. 예상했던 대로 1000원짜리 만두 가게는 사라졌고, 내가 알던 조립식 주택들도 남은 게 없다. 넓어진 도로와 예쁜 정원을 가진 집들이 가득하고 경찰서와 주민자치센터가 들어섰다. 우리 집이 있던 골목도 사라졌다. 그 골목을 돌아가면 낡았지만 단아했던 2층집이 첫 번째로 있었는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 옆에 있던 우리 집도 사라졌다. 나는 골목이 있었던 자리에 멍청히 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후들거리다가 끝내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뻑뻑해진 눈을 느리게 껌뻑거리며 입술을 축였다. 내가 기대한 것이 무엇이든 과거가 사라졌다. 스승님의 말처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때가 마침내 온 것이다.  

후두둑. 눈물이 갑자기 떨어진다.  

[바보같이..] 

마음속으로는 이 보다 더한 욕이 떠오르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삶을 선택한 순간 나는 그들을 잊었건만, 이렇게 내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이 진짜로 없음을 체감하는 게 이상하게 고통스럽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울렁증이 생길 정도로 아프다. 아침을 굶어 뱉어낼 것도 없는 위가 계속 조여들었다.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누웠다. 아픈 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검고 커다란 형체들로 이루어진 도로 위의 집들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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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나와 함께 파티에 가야하니까 준비해라]
[파티요? 어떤 파티인데요? 누구 생일인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는데 스승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내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아무것도 물으시지 않는 게 고마워서 미소지었다.  

[정부 관료가 여는 칵테일 파티인데, 일 때문에 가는 거야.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자리니까 부탁한다] 

스승님은 여느 때처럼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보시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옷이랑 구두 같은 거 사게 돈 주실 거죠?]
[카드로 해라]
[에이~현금 쓰면 덤으로 얻는 게 많은데..치이] 

입을 쭉 내밀고 징징거리자 스승님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건내주었다. 현금이든 카드든 알아서 쓰라는 의미다. 지갑 안을 살짝 들여다보는데 스승님의 말이 들렸다.

[돌아와서 고맙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아는 걸까? 물어보고 싶어도 문을 열고 나가는 뒷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 곧 방 안에는 나 혼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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