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해가 뜰 텐데..왜 여기 있니?]

예전 집에 비하면 정원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초라한 풀 밭 위에 앉아 있는데 스승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고개만 뒤로 젖혔다.

[그냥요]
[복잡한 기분일 때는 다 잊어버리고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렴]

옆으로 다가와 내려다보고 계시는 스승님의 손을 살짝 잡았다. 여느 때처럼 차갑지만, 나와 같은 체온이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제가 좋아하는 일? 뭐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스승님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넓고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스승님의 손이 긴 머리카락들 사이로 들어와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게 느껴져 눈을 감았다. 

[제가..마타래요]

스승님은 그 말을 듣기 전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쓰다듬었다. 강철같이 딱딱한 품인데도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알고 계셨죠?]

대답은 없지만 나는 되묻지 않았다.

[힘드니?]

몸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도망갈까?]
[정말요?]
[니가 원하면..]
[그래도 프릭스와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요. 어디에 있는지가 이젠 중요하지 않아요]
[나와 함께하면 너는 뱀파이어로써 강해질 수 있다. 네가 원하면 마타라는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을만큼]
[그게..무슨 뜻이에요?]

스승님의 손이 내 가슴 위에 부드럽게 닿았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내 귀와 목을 간질였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손길에 이 행동들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스승님의 대답에 목 뒤가 서늘해졌다. 프릭스와 난, 마음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결된 운명이라 생각했는데 그 사슬을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스승님의 여자가 된다는 건 프릭스의 맹세를 들은 것 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넌 특별하기 때문에 완전한 뱀파이어가 될 수 없었던 거니까 이젠 자신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스승님의 가슴을 때렸다. 통나무를 주먹으로 치는 느낌이라 과연 그가 아픔을 느낄까 싶었는데, 그는 슬픈 표정으로 손을 잡았다.

[마타가 되고 싶다면 놓아줄 수 있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정말 모르세요?]

스승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내 깊은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사람처럼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의 미래를 내게 맞쳐달라고 할 순 없다]
[겁쟁이]
[그래, 나는 겁쟁이지]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햇살이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먼저 일어나 등을 돌렸다. 2층 창문에서 프릭스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올려다보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

잠을 설친데다가 삼차신경통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주방 탁자에 엎드렸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줌마는 혈액이 담긴 잔을 내 앞에 내려놓고는, 할 말이 있는데 꺼내기가 거북한 사람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손님방에 묶으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마타였어요]
[정말요?]
 

나는 기절할 만큼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줌마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연히 들었어요]
[그 여자분..혹시 스승님과 연관된 분인가요?]
[그 부분은 직접 들으세요. 다만 그 분이 사라진 후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시는 걸 처음 봤어요]

그 말뜻을 이해하자 입 안의 침이 몽땅 사라졌다. 입술이 쩍쩍 갈라지는 듯 한 느낌이라 혀로 문질러보지만 덜덜거리는 자동차처럼 상태가 안 좋다. 지금 내가 놀란 게 또 다른 마타 때문인지, 아니면 스승님의 과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거대한 망치로 맞은 듯 한 느낌은 기분 나쁘다. 머리를 감싸 쥐면서 얼굴을 찡그리자 아줌마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겠지만, 누구를 선택하시든 남는 분에 대해 죄책감은 가지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나는 그녀의 안쓰러운 표정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삼차신경통 때문에 밥 생각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주방을 나왔다. 내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프릭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 그가 묶고 있는 손님방으로 걸어갔다.

[마타가 뭘 할 수 있니?]
[자세히는 몰라. 내가 아는 건 프릭스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정도]
[제어?]
[맹세를 한 순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야. 일종의 인형이랄까. 네가 요청하는 걸 몸에 담아 행동하는 인형]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라고 하면 그것도 해?]
[너무 극단적인데..아마 하겠지. 그런 것도 가능한지 물어볼게]
[누구한데?]
[다른 프릭스들]
[아...]

그가 말했던 다른 프릭스들이 머릿속에서 기억났다. 그리고 스승님이 그들과 텔레파시가 가능하냐고 물어보신 것도. 아무래도 그들을 만나봐야 의문점이 완전히 풀릴 가능성이 생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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