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재생 능력으로 완벽하게 복구되었지만, 그 고통이 몸에 각인된 듯,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쉰 후, 나를 놓아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어. 널 아프게 한 거 정말 미안해]

지금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 그 눈길에 마음이 흔들린다. 스승님에 대한 내 한결같은 느낌은 변하지 않음을 알지만, 나를 위해 목숨을 내건 그의 행동이나, 지금 같은 진실된 말들이 조금씩 내 안의 무엇인가를 무너뜨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피하고 싶어졌다.

[머리가 좀 아파]
[시영아]

등을 돌려 걸어가는데 비 속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나는 잠시 멈쳐섰다가 그대로 현관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와 나, 그리고 스승님. 내 일상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어지럽다.



*************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다가 포기하고 일어나 밖을 보니 오전 11시인데 어둡고 칙칙했다. 평소같으면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창문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럽고 하늘은 구름만 가득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거실로 내려왔더니 집안이 썰렁한 게 무덤 속처럼 느껴졌다.

[스승님은 아직 연락 없어요?]
[네]
[프릭스는?]
[나갔어요. 도서관에 간다고 하던데..]
[도서관? 거길 왜요?]
[마타..하여간 그런 말을 하며 나갔어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없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스승님과 그, 두 사람이 나에게 이런 느낌을 준다는 사실에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저 사람들 언제까지 저렇게 있을까요?]

아줌마는 파카글라스에 피를 담아 거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가져왔다. 이곳에서는 정원 너머의 도로가 보이는데 검은 차가 아직도 서 있었다.

[혐의가 사라질 때까지겠죠]
[오늘 아침에 배달된 뱀파이어 타임즈를 보니까 사망자가 2명 더 생겼어요. 아가씨는 어제, 오늘 집에 계셨으니 아닌 걸 알 텐데..]
 

아줌마는 징그럽다는 듯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뱀파이어 백화점에 다녀오겠다며 소파 위에 둔 모자와 숄을 걸쳤다. 
 

[꼭 필요한 것만 사세요]
[더 사고 싶어도 그럴 돈이 없네요]

아줌마가 나가는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할 일이 없어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마타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일어났다. 그가 도서관까지 갈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사항일 테니 어쩌면 스승님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실을 지나 좁은 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스승님이 없으면 먼지가 쌓인 채로 외면당하는 책들이 즐비한 방이라 나는 출입하지 않는 편이다. 방문을 여는 순간, 탁하고 칙칙한 향이 코로 가득 들어왔다. 간질간질한 먼지도 함께 먹었는지 재채기가 연속으로 터졌다. 콧물이 나오는 걸 대충 닦으며 서가를 훑었다. 백과사전 같은 건 아예 없으니, 스승님의 미국판 의학 서적을 봐야겠지만, 솔직히 영어는 젬병이다. 사람으로 살 때도 시험만 보면 영어는 치가 떨리는 점수가 나왔으니 뱀파이어가 돼서까지 영어와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내 영어 실력은 떨어지면 떨어졌지, 결코 좋아지진 않았다. 서가의 꼭대기쯤에서 두꺼운 의학서적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먼지가 눈에 보일정도로 피어올라 나는 코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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