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늦었다는 핀잔의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따라오십시오]

스승님의 옆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뒷짐을 풀고 스승님보다 두 발자국 정도 앞에 서서 걸어가는데, 그는 아주 조금씩 발을 절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복도는 좀 전의 밝고 매력적인 광장과는 사뭇 달랐다. 불빛이 20분의 1로 줄어들어 복도 곳곳에 어둠이 기어 다니며,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엔 우리의 발자국 소리만 크게 울려 퍼졌다. 만약 이 복도가 경찰서의 시작 지점이라면 건물의 외곽만큼 아주 탁월한 인테리어다. 광장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에이..별거 아니네 라는 배포를 키워준다면, 이 복도는 걸어가면서 점점 주늑들게하고,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공포가 가득했다. 나 역시도 짧은 뱀파이어 생활 동안 잘못한 게 없는지 되짚어볼 정도였으니..

검은 양복의 남자는 복도 제일 끝에서 멈췄다. 정면의 대형 유리는 특이하게도 밖은 보이지만 달빛은 통과하지 못해 첫 번째 문을 열 때까지도 주변은 상당히 침침했다.

[민시영씨는 이 곳으로..]

문이 열리며 양쪽으로 보이는 방 중 왼 쪽으로 나를 인도하는데, 동시에 방문을 통해 뿜어져 나온 환한 빛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 여기는 어쩌면 이리도 극과 극인가! 이게 지도자의 취향이면 변태 아니야?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지러워지면 말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정답을 떠올리지 마라]

스승님은 겁에 질려 손을 잡는 내게 귓속말을 했다. 매우 낮은 속삭임이라 긴장하고 듣지 않으면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작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한 후 목소리가 들린 방으로 들어갔다.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탁자와 의자만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매우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소파가 나를 반겼다.

[또 만나네요]

부드러운 목소리는 스승님께 깍듯이 인사하던 근육질의 남자였다. 그는 내가 겁먹었음을 알고 천천히 웃으며 손짓했다.

[신발을 벗고 침대에 편히 누우세요, 잡아먹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침대와 그를 바라보니 또다시 밝고 맑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스승님은 사라지고 방문은 닫혀 그와 나 뿐이다.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손의 위치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 배 위에 포개놓았다가 다시 풀어 옆구리에 붙였다. 머리 속에 드는 생각은 앞으로 닥쳐올 일이 무엇이든 스승님의 당부를 잊지 말자..였다. 천장은 유리 같은 구조로 근육질의 남자가 옆에 놓인 은색 통의 뚜껑을 여는 게 비쳤다. 그 안에는 주사기가 한 개 놓여있어 두려움이 머리를 쭈뼛하게 만들었다. 1분 쯤 지나자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 온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시작할까요?]
근육질의 남자가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시영씨, 지금부터 사망자에 대한 진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과거에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나는 도리질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민시영씨의 경우, 참고인이면서 동시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바, 진실한 답변을 얻기 위해 약물을 투여합니다. 뱀파이어 평화조약 제 23조 1항에 의거하여 1단계 약물을 사용합니다. 약간의 어지러움이 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임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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