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려주세요]
[늦겠다고 말 한거 잊었니? 니가 꾸물대는 통에 차도 못 타게됐어. 꽉 잡아라]

창문에서 바닥으로 뛰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100년쯤 된 은행나무 가지쪽으로 점프했다. 오른발이 닿는 가 싶더니 바로 다음 나무로, 또 다음 나무와 지붕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흐린 달빛 때문에 우리가 뛰는 걸 제대로 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스승님의 속도가 무섭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행복해졌다. 옷이야 이래도 스승님이 나를 꼭 안고 (어깨에 둘러맨 것도 안은 거라고 쳐준다면) 바람을 가르며 제트기처럼 뛰니, 없던 봄바람이 내 귀와 머리카락을 흔들어놓고 사라진다. 나로서는 잘 매달려있는 것 이외는 딱히 할 일이 없어 하늘의 구름이나 세며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점점 속력이 줄어들었다. 한강 둔치를 지나고,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 건물을 넘어 북서울숲 공원으로 들어서면서 보통 사람들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수준이 되었다. 마침내 공원 동쪽에서 멈췄는데 그곳에 바로 음침하고 보기 싫은 뱀파이어 경찰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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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혹시 고문당하는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스승님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나에게 이 건물은 무겁고 딱딱한 느낌이고, 검정 페인트 덕분에 질 나쁜 뱀파이어들의 소굴로 보였다. 문득 꿈에서 본 끔찍한 장면들이 생각나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다.

[혹시나 니가 걱정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구해주마]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약속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1분쯤 지나 스승님에게서 떨어진 후, 계단 앞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뱀파이어 경찰서는 주민자치센터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2층 건물이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는 제 역할을 다 했다. 온통 시커먼 검정에 군데군데 붉은 기운과 경찰서라는 글씨는 이 곳에 오는 모든 뱀파이어들을 겁먹게 만들어 손만 들어도 죄를 불어버리게 할 태세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스승님을 따라갔다. 주민자치센터와 마찬가지로 현관문 손잡이는 뱀파이어 확인용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 문을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가 경찰서 맞아요? 이건 백화점 보다 더 커요]
[연구소가 함께 있어서 그래. 지도자가 돈을 쏟아 부었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호화롭다는 강남백화점보다도 더 큰 광장과 천사상의 분수, 2층으로 연결된 은색 에스컬레이터까지 별게 다 있었다. 밖에서 본 건물은 한 층에 상가 5-6개 정도 가 들어가면 끝날 크기로 보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안은 공설 운동장이었다. 뱀파이어가 마법도 부릴 줄 아나? 그건 영화에 나오는 허구 아니었나?.. 라고 중얼거렸다.

[약간의 환각이야. 실제는 이 크기인데 밖에서 볼 때는 극히 일부만 보이고 나머지는 숲인 줄 알게 하는]
[아..여긴 북서울숲이니까요]

스승님은 빠르게 광장을 가로질러가면서 내 의문을 풀어주셨다.

[호화롭게 만들 재정이 있으면 굶어죽는 뱀파이어들을 좀 도와주지..]

광장을 가로지른 후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세계의 명화로 도배를 해놓은 계단 벽을 둘러보느라 앞에 장애물이 있음을 모르고 걸어가다가 이마를 박았다.

[늦으셨습니다]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더니 나를 두들겨 팼던 검은 양복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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