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 멍하니 따라가다 보니 스승님이 멈춘 줄 몰랐다. 그 바람에 쿵 소리를 내며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스승님이 돌아보며 나를 붙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내 것 만큼이나 차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만지거나 스칠 때는 불 같이 뜨겁다는 생각이 든다.

[별 거 아니니까 놔 주세요]

스승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나는 용광로에 뛰어든 기분이 들어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왼 쪽 하이힐이 삐꺽거리며 꺾였다. 다리가 삐딱하게 구부러진다는 건 몸이 확 쏠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머리에 그려지는 가운데 스승님이 손을 놓아주는 순간 삐끗한 왼 쪽으로 몸이 미끄러져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엉덩이에서 뇌로 전달되는 둔탁한 아픔보다는 맘먹고 입은 치마와 하이힐이 망가졌다는 게 속상해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스승님이 갑자기 서니까 이렇게 된거잖아요]

흙이 묻은 치마를 잡아당기며 엉뚱하게 짜증을 부리자, 스승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두 팔로 허리를 잡아 벌떡 일으켰다. 서고 싶어도 왼 쪽 하이힐이 부러져 설 수 없음을 아는지, 나를 어깨에 둘러맸다. 그리고는 부러진 하이힐을 내 손에 들려주셨다.

[세상이 흔들려요. 그냥 신발 벗고 걸어갈게요, 내려주세요]
[맨 발로 다니면 다쳐서 안 돼]
[그럼..백화점에라도 가요. 치마 다시 사야죠]
[집이 더 가까워. 그리고 우리 늦겠다]

스승님은 현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고니아가 가득한 정원으로 걸어갔다. 내 방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한 번 몰아쉰 뒤, 나를 어깨에 얹은 채로 점프를 시도했다.

[어..어..]

내 몸이 앞뒤로 흔들리며 바람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뱀파이어가 2-3층까지 점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40킬로가 훌쩍 넘는 여자를 들쳐 매고 뛰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스승님은 마치 시냇가에 놓인 돌다리를 팔짝팔짝 건너듯이 가볍게 2층 창문가에 착지했다.

[이거 입어라]
[싫어요]
[그럼 이거?]
[절대로 안 입어요]

방 안에 들어가서야 나를 바닥에 내려주신 뒤, 침대에 가득 펼쳐놓은 옷 중에서 긴 정장 바지를 건네주셨다. 그건 겨울용으로 두껍고 묵직하며 지금 입은 갈색 정장용 웃옷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다음에 건네준 건 발목까지 오는 치마.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모두 거절했다.

[지금 니 치마는 너무 짧아. 속이 다 보이겠다]

팔짱을 끼고 말하는 폼이 흙이 묻긴 했지만 상당히 매력적이고 폼 나는 갈색정장을 폄하하며 승낙할 수 없다는 무언의 압력을 전달했다. 나는 경찰서든, 지옥이든 스승님과 함께 간다는 기쁨에 머리카락과 싸움하며 올림머리를 했는데, 부딪히고, 넘어지며 하늘을 날아오다 보니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몇 가닥은 아예 목까지 내려와버렸다. 아마도 지금 나는 결혼식을 치루느라 고생한 신부가 다리 펴고 누웠다가 일어난 몰골일 것이다.

[차라리 추리닝을 입으라고 하시죠?]
[음...그게 나을까?]
[스승님!]

진지하게 고민하는 말투에 그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스승님은 재빠르게 다가와 입을 막았다.

[도둑든 줄 알겠다, 조용히 말해]

입이 한가득 나와 스승님이 골라줬던 옷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추리닝 세트를 들고 일어났다. 스승님이 뒤돌아 있는 사이에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한심 그 자체다. 풀어진 머리에, 고등학생 같은 옷이랑 스타킹을 신은 발이라니..정말 어느 남자도 관심 없어질 만한 모습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가자]

내 모습을 훑어보는 스승님의 미소가 세상에서 제일 얄밉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나를 어깨에 다시 들쳐 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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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사람 2010-07-21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곳에 오면 글이 올라왔나 찾아봅니다. 없으면 언제 올라오나...실망감과 함께 조금만 더 빨리..라는 조바심이..

세레스 2010-09-1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게 된 자의 여유... 하지만 그것도 곧 끝나가는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