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학마을의 최고령자 청산 할매보다도 한 참 전이다. 그 때도 이 얼굴이었고 지금도 이 얼굴이다.
[낚시하러 갑시다]
불판의 쇠고기를 입에 넣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여자는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든다. 얼굴빛이 환해졌다.
[진짜요? 언제?]
[조만간..]
그때 자리를 비웠던 여자의 전 남편이 돌아와 그들의 대화가 끝났다. 그는 잠시 보였던 웃음을 지워버리고 팔짱을 꼈다. 그것이 평소의 모습이라 전 남편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가보겠다고 일어서며 살짝 그녀를 보았다. 낚시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입이 귀에 걸려있다. 그렇게 웃으니 자신이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 맞다.
[물고기들이 돌아왔소]
그는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저수지를 몇 번이나 갔었다. 지옥의 호수가 이번에는 그 곳에 오리라는 걸 미리 알았기 때문에 나타나면 바로 움직이려고 작은 배도 공수하고 산신들에게 낚싯대와 물통도 받았다. 드디어 비가 쏟아지고 지진이 나면서 호수가 저수지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있는 집 앞 수로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말을 건넸다. 대청마루에 있던 여자는 재빠르게 우비를 입고 달려 나왔다. 전 남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보고만 있어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세 사람은 저수지로 갔다. 비가 거세져서 호수를 삼킨 저수지는 수면이 거칠지만 통에 한가득 은빛 물고기가 가득 차도록 낚시를 즐겼다. 전 남편이 엎드려 구역질을 하는 동안 그와 그 여자는 행복한 한 때를 보냈다.
여자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알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다보니 혼자인 게 외로울 때 그 여자를 만났다. 아주 어린 아이여서 기억하지 못해도 자신은 그 덕분에 몇 십 년을 잘 보냈다.
학마을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종종 그 여자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사춘기겠구나, 이제 곧 사회인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시간이란 십년 전이나 십년 후나 하루와 같다. 아무 때나 찾아가면 볼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녀가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보겠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그 여자가 어느 날 학마을에 왔다. 구들댁네 막내 아들의 전 아내로..행운이 마침내 그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항상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들을 위해서만 살다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게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자를 웃게 하고 싶어 제일 좋아한다는 낚시를 제안했고 그 여자와 이렇게 물고기를 맛나게 뜯어먹는 중이다.
[몇 마리 가져다주시게]
전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부석사 가까이에 사는 너구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지금은 망설이고 있지만, 둘이 이어져야 여자도 자유로워진다. 아직 깨닫지는 못하지만 전 남편을 붙잡고 있는 손을 그래야 거둘 수 있다. 정직해지자고 스스로 생각한다. 욕심이 나서 그 둘을 꼭 이어주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가 떠난다고 한다. 전 남편을 따라 서울로 내일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는 전날 밤부터 도로에 서 있었다. 잠이란 그에게 불필요한 일이니 달이 저물고 해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그 여자를 태운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저만치서 차가 온다.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빵..소리가 나고 차가 점점 속력을 높인다. 그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죠?]
가을이 지나고 첫 눈이 올 때가 되었을 쯤 그 여자가 혼자 나타났다. 그동안 몰래 여자가 입원한 병원에 가보았지만, 들어가거나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잘 있으면 다행이다 하면서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왔다.
[나 이제 여기 살 거니까 청소 좀 도와주세요]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잡아끈다. 하여 얼떨결에 같이 대청마루를 청소했다. 부엌도 치워주고 같이 장도 보았다. 그 다음날 묵 파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더니 그 여자가 좋다고 웃는다.
[우리 사귀어 보지 않을래요?]
묵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옆에서 말없이 걸어가던 여자가 뜻밖의 말을 한다. 놀라서 진심인지 확인하려고 눈을 쳐다보니 빙그레 웃는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나는..다른 존재인데..상관없소?]
[유한한 인생, 마음이 맞고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런 문제로 포기하기엔 아깝잖아요. 싫으시면 그냥 서울로 갈께요]
진짜로 여자가 가 버릴까봐 얼른 손을 잡았다. 그를 보면서 여자가 큰 소리로 웃는다, 그 옛날처럼..그제야 자신이 나누어 주고 있는 행운이 어떤 느낌이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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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저는 개인적으로 권선생보다 도토리묵 장수를 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