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를 준비하는 2월의 방학이다. 지금은 중3인 아이들만 나와 보충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선생은 돌아가면서 학교를 지켜야 해 전직원이 순번대로 일직을 선다.

[점심 뭐 먹을까요?]

  오늘 같이 근무하는 체육 선생이 물어본다. 아무거나..라고 대답을 한 뒤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하였다. 12월에 눈이 심하게 온 날, 학마을에 다녀온 뒤로는 그날이 그날이다. 반면 아내는 간간히 전화를 해 학마을의 재미나고 기이한 일들을 알려주고 도토리묵 장수와 묵을 팔러 다녔던 일도 자랑한다. 

[감사합니다, 서울중학교 교무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앞에 놓인 인터폰이 울려서 기계적으로 멘트를 말했다. 몇 일간 전화 업무를 열심히 했더니 핸드폰으로도 이런 말을 한다. 경비실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 학교는 정문에서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에 외부인이 쉽게 드나들지 못한다. 나는 체육 선생에게 점심이 오면 먼저 먹고 있으라고 일러둔 뒤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봄이면 아름다운 목련이 가득한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이백 여 미터 떨어져 있는 경비실 쪽을 바라보았다. 빨간 외투를 입고 검은 장화를 신은 사람이 서 있었다.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하얀 가방을 들고 있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등을 보이고 있다가 돌아섰다.

[숨 막혀요] 

  너구리 아가씨임을 확인한 순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꽉 안았다. 작은 키 때문에 내 가슴에 묻혀 갑갑하고 당혹스러운지 벗어나려고 한다. 놓치면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봐 손목을 잡고서야 한 발짝 물러났다. 경비아저씨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나는 목례를 하고는 너구리 아가씨를 잡아당겨 학교 건물로 달려가다시피 걸었다. 종종종종 발소리가 들리고 빠른 내 걸음을 따라 끙끙거리는 게 등 뒤에서 느껴진다. 남교사 휴게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분이..알려주셨어요. 저 좀 앉아도 될까요? 다리가 아파서요]

  한참을 걸어왔다며 다리를 두드린다. 나는 그제야 의자를 내어주고 반대편에 앉았다. 어울리지 않는 하얀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서울은 너무 복잡해요. 잘못 내려서 한참 헤맸거든요. 이런 곳에 살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요. 아저씨는 어디 사세요? 여기서 멀어요?]
[가까워]
[참, 언니가 아기 나았어요. 여자앤데 얼마나 예쁜지..사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나중에..]

  쉬지도 않고 떠들어 대다가 사진을 보여준다며 가방을 들썩이자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야 입을 꼭 닫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6개월여 만에 보아서인지 어딘가 어른스러워진 듯하다. 계속 흔들고 있는 다리만 빼면.

[여기 왜 온 거야?]
[아저씨가..그리워서요]

  머리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눈물이 가득 고여 터질 것 같다.

[아저씨도 나보러 왔었잖아요. 지난번에 눈 내릴 때..동굴에 아저씨 냄새가 남아 있었어요] 

[그래, 갔었어]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그동안 노력했어요, 잊고 살아보려고요. 얼굴도 희미해지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요. 혹시라도 아저씨가 아니라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봐 몇 번이나 내 마음을 접으려고 했어요. 그런데도..마음의 소리가 사라지지 않아서..]

  눈물이 빰을 타고 흘러내리자 나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너구리 아가씨가 잡고 일어서자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껴안았다. 부드럽고 조그마한 느낌.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건 또 뭐가 있다고..]
[하지만..나는..너구리인데..]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 말마따나 유한한 인생에 그녀가 너구리고 내가 사람인 걸 신경 쓰자니 문득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이제야 스스로 만든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다.

[내가 머뭇거릴 때도..물러설 때도..넌 최선을 다했어. 게다가 이렇게 날 찾아올 만큼 용감한데 뭘 두려워하니?]
[사실은 왜 왔냐고..가라고 할까봐..밖에서 한참 서성거렸어요]

  너구리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련의 새 눈이 올라오는 게 이제 곧 봄이다.

[잘 왔어. 보고 싶었다] 

  내가 일주일 뒤에 짐을 주섬주섬 싸는 데 가만히 보고 있던 너구리 아가씨가 그러지 말라며 매달린다. 본인의 말로는 여기가 재미있으니 괜찮다고 하는데, 밤에 달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이게 아니다 싶었다. 나는 서울에도, 학마을에도 살 수 있지만 너구리 아가씨는 학마을에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행복해지는 삶이다. 이 곳에 계속 있으면, 나를 배려한다고 그리워도 말 안하고 가슴에 묻을 것이다. 그런 부분이 우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이다.

[학마을에 안가도 되는데..]
[아니야. 그리로 가자]
[아저씨 일은 여기에 있잖아요]
[그만 뒀어]
[네?]
[지금 가장 중요한건 나와 너니까..]

   학교를 그만두고 집도 내놓고 가뿐하게 나섰다. 말은 그리했어도 학마을에 가는 게 좋은지 그녀는 연신 싱글벙글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같이 지낼 수 있는지, 무엇을 하며 먹고 살지, 그녀의 언니와 청산 할매는 어떻게 설득해야할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고난의 가시밭길이 되겠지만 이렇게 선택한 이상 달려야지 별수 없다. 도착점에 가면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학마을은 기이한 곳이고, 나 역시 기이한 인연으로 그곳에 다시 돌아가니 안 될 것이 또 무어냐고 생각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손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파이팅! 그녀를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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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학마을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외전이 하나 있어요. 도토리묵 장수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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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사람 2009-10-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즐겁게 읽었습니다. 매일 부지런히 글을 올려주셔서 고생많으셨어요~도토리묵 장수에 대한 나머지 글 기다릴께요^^

최현진 2009-10-13 16: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우주바다 2009-10-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바빠 건너뛰다 들어왔더니 -마지막회-라는 글만 읽히네요..마지막글은 눈물이 날만큼 애잔한데..너구리아가씨와의 학마을이야기도 계속 듣고 싶은데 어쩌죠...작가님의 이름 계속 기억하고 있을께요..언젠가 다시 글 올리시겠죠..기다리고 있을께요..간간히 그곳 소식 들려주세요..그동안 고생하셧습니다..항상 건강하세요..그리고 행복하세요 ^-^

최현진 2009-10-13 16:19   좋아요 0 | URL
다음 글을 준비하고 있어요..새 연재 시작하면 놀러오세요^^

yo! 2009-10-1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회부터 봤어요! 호기심이 생겨서 1회부터 읽어야겠어요^^;(후진입니다~하하)

최현진 2009-10-13 16:19   좋아요 0 | URL
후진..ㅎㅎㅎ. 하긴 제 글이 각각 따로 봐도 크게 무리가 없으니..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