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중학교에 원서를 넣어두었지만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가망성이 별로 없다. 아내는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학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돌봐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내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들어서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게 전부다.
[직장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같이 있어요]
[그래도 될까?]
서울에 도착해 장모님이 남겨주신 집에 데려다주었더니 남은 방을 쓰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학마을에서 같이 지내면서 확실히 편해졌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병원에서는 뭐래?]
[입원하래요]
[그럴래?]
주말 밤에 학원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아내가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다녀온 일을 감정 없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원에 대한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우리..학마을 가면 안 돼요?]
[왜?]
[거기..참 좋았어요]
그녀가 그곳에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약간은 이상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며 기이하기까지 한 곳인데 놀라고 거부하는 대신 그리워한다.
[가고 싶다면..보내줄게]
[당신은 안가고요?]
[나는 가고 싶지 않아]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돌아온 뒤로는 술을 마셔야 잠이 든다. 맨 정신으로 자면 꿈이 끊임없이 이어져 잔 것 같지가 않다.
[요즘 술이 늘었어요]
[이렇게 마시고 자면 숙면에 좋아서..]
아내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1-2시간 정도만 얼굴을 보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별일 없었는지 안부를 묻고 나면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게 되어 어느 쪽이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안녕을 고한다.
나는 술을 좀 더 마시려고 냉장고를 뒤졌다. 아내가 사다두었는지 냉장고 구석에 비름나물이 보인다.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 예전에는 기억력이 좋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소소한 일상도, 자라면서의 다양한 경험들도 다 아이들에게 이야기꺼리가 되고 동료들이나 친구들과의 대화 소재가 됐는데, 요즘은 그런 기억들이 싫다. 더 정확히는 최근의 일들이 그대로 생생히 남아 있는 게 부담스럽다. 한 달이 지나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따뜻했던 온기와 한 숨 쉴 때 가슴의 움직임까지..언제쯤이면 잊을 수 있을까.
생각지도 않았던 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그 학교에 있는 선배가 빨리 서류를 내보라며 재촉했다. 이력서를 쓰면서도 내가 학교 복귀를 정말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의욕이 나질 않는데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한심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정신 없이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서류를 접수하러 선배의 중학교를 방문하였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네. 좀 어두워진 것 같기도 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선배님도 저도 변하죠]
[넌 왠지 안 그럴 거 같았어]
서류 접수와 면접 후에 선배의 얼굴을 보려고 잠시 기다리니 배가 제법 나온 사람이 걸어왔다. 처음에는 선배인지 몰랐는데 웃을 때 보여주는 특이한 미소 때문에 알아보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인지 살이 많이 쪘다. 잘 안 움직이는 교사들의 특성 탓이다. 학교를 그만 두지 않았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운동장 한편에 앉아 축구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학교는 전 구역이 금연이라 골초 선배도 담배를 만지기만 할 뿐 피지 않는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다들 많이 변했죠?]
[그럼. 살기가 빡빡하니까 이젠 만나도 좀 그래]
[선배는..결혼 하셨어요?]
[아니. 그보다 너 이혼한지 꽤 됐다는 소릴 들었는데 사실이야?]
[네]
[나야 이젠 나이가 이러니 못 한다손 치고, 너는 왜 그러고 있니?]
그는 내 기억에 항상 직선적이었다. 출판사 후배처럼 물어보고 싶은 말을 빙글빙글 돌리지 않고 머뭇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나와는 다르니까..
그를 만나고 다시 학원으로 들어가 그날의 강의를 준비하다보니 가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곳으로 내 안의 뭔가가 새어나간다.
[거울은 보고 다녀요?]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서 무릎을 양 팔로 껴안고 있다.
[아침 마다 나가기 전에..왜?]
[몸은 움직이는 데 표정이 없어요. 나 힘들어..그런다고요. 이럴거면 차라리 당신이 시골로 가는 게 좋겠어요]
[알았어.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스스로한테 미안해야지]
웬일인지 아내가 또박또박 말을 많이 한다. 여전히 무릎을 감싸 앉은 자세지만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나보다 더 편해 보인다.
[다음 주에 입원할 거예요]
[그래]
[이 집..세 줄 거구요]
[알았어. 나갈 곳 알아볼게. 그동안 고마웠어]
우리의 대화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아내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먼저 들어갔다. 아내가 자기 갈 길을 찾는 것처럼 나도 그 학교가 되면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눈을 떠야겠다. 스스로에게 이 이상 더 초라해지지 않게..
다음 주 월요일에 연락이 왔다. 선배 덕분인지 1학년 3반 담임과 함께 2-3학년 교과를 맡았다. 그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고 짐을 옮긴 후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것까지 도와주다보니 한 주가 빨리 가버렸다.
[이번엔 꼭 다 낳아서 도토리묵 장수를 만나러 갈거에요]
[왜?]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처음 당신이랑 알게 되었을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에요]
[처음? 우리가 어땠지?]
[사람들이 원조교제라고 놀렸잖아요. 그래도 좋다고 매일 같이 다녔는데..이젠 기억이 안나나봐~]
첫 근무를 하게 된 후 한 달이 지나서 아내를 찾아갔다. 우리는 병원 벤치에 앉아 가을 바람을 쏘이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한 결 밝아진 표정으로 재잘재잘 말을 한다.
아내가 도토리묵 장수를 생각하고 있음에 놀랐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느라 빵..소리를 낼 때 아내가 돌아본 건 학마을이 아니라 도토리묵 장수였음을 이제야 알았다. 아내는 확실하게 내게서 벗어났다. 그녀는 목표가 생겼다며 어떻게 치료에 전념하고 언제쯤 나가서 돌아갈 것인지 한참을 떠들었다. 목소리 톤이 예전보다 높아진 게 그녀의 뜻대로 될 것 같다. 우울증의 바다에서 그녀는 등대를 발견했고 그것이 부럽다. 나는 아직도 표류하는 기분인데,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먼저 빠져나오니 존경스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원에 들렀다. 은행잎이 가득 떨어져 있어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숲 속을 마실 다니는 기분이다. 게다가 다람쥐인지 청솔모인지가 나무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걸 우연히 보았다. 대도시에 그런 동물이 있다는 게 놀라워서 한 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잘 지내니?]
학마을이라면 마지막으로 힘내어 잘 익으라고 햇볕이 논밭에 강하게 내리쪼이고 있을 것이다. 그녀도 즐겁고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학마을의 그 햇빛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