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수로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권선생, 천렵갈텐가?]
[지금요?]
[응. 왜 바빠?]
[아니요, 별일 없어요]
[그럼 안사람과 빨리 나오시게]

  옆집에 놀러오신 황주 할매가 재촉 하신다. 아내는 잔다고 누워있다가 들었는지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천렵? 그게 뭐에요?]
[피크닉이라고 해야하나? 가까운데 놀러가는거야]

  아내는 어르신들의 뒤를 다소곳이 따라가면서 소곤소곤 물었다. 서울 토박이다보니 여기 말을 몰라 애먹는 일이 많다. 얼마 전에 메주를 만들 때였다. 잘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찧는데 청산 할매가 아내에게 “오봉”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내는 머뭇거리다가 처음에는 쓰레기 봉투를, 두 번째는 막대기를 들고 갔었다.

[쟁반 가져오라는 말이야]

  학마을 사투리로 오봉이 쟁반이다. 사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나 들은 말이라 처음에는 그게 뭐였지..하면서 고민했다. 그래서 아내는 오늘도 눈치를 보면서 알려달라고 옆구리를 찔렀다.

[색시가 모르는 게 당연한데 뭘 그렇게 주눅들어있나]

  청산 할매가 돌아보며 웃으신다. 아내는 다른 할매는 어려워해도 청산 할매와는 잘 지내는 편이다. 돌아가신 장모님이 생각난다고 하면서..나도 청산 할매랑 있다보면 종종 어머니가 떠오르니 다들 느끼는 건 비슷비슷하다.

[어디로 가는데요?]
[폭포]
[폭포? 학마을에요?]
[그럼! 여기도 폭포 있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때이긴 하지만 8살까지는 학마을 주변을 안 다녀본 곳이 없다 싶게 돌아다녔는데 폭포는 없었다. 내가 떠나있던 20여년 사이에 인공 폭포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항상 있는 건 아니야. 딱 요맘때만 있어]
[그럼..신기루 같은 건가요?]

  이번에는 아내와 내가 웃었다. 학마을은 딱히 폭포라고 내세울만한 곳이 없는데 일년에 한 번, 혹은 2-3년에 한번 정도 폭포가 생겨난다고 한다. 특히 올해처럼 장마가 확실하게 있었을 때는 한 달 정도 존재하는데, 산꼭대기에 쌓인 물이 쏟아져서 폭포라고 부른다. 아마도 세상이 변해가면서 자연도 바뀌어 이런 현상이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지 않던가.

[와! 멋지네요]
[암. 천렵을 가려면 이런대로 와야 제 맛이지]

  석청을 따러 가던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서니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 웅장하지는 않으나 뒤로는 동굴 입구가 보이는 호젓한 폭포다. 할매들은 널찍한 바위에 짐보따리를 푸신다. 어떤 분의 짐에서는 고기와 채소가, 또 누군가는 막걸리를 꺼내신다. 아내와 나는 아무것도 가져온 게 없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따, 한 동네 사는데 뭘 그런걸 따져. 즐겁게 먹고 놀면 되지]

  우리네 민족은 풍류를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 고된 농촌 생활에서도 이렇게 천렵 갈 시간을 만든다. 가을은 추수를 하고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쁜데도 구경삼아 나오니 어르신들의 마음 씀씀이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선생, 요즘 복잡하지?]
[할매..그게..]
[미물도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거늘..하물며 사람 일이란 건 더 큰 뜻이 있는 법이니까 쉬엄쉬엄 가시게]

  스스로도 혼란스러운데 무슨 말을 하겠냐 싶어 할매에게 상의를 안 했는데 어쩌면 전부 아시는 듯 느껴졌다. 오랜 세월을 사셔서 그런가, 가끔 앞일을 내다보시는 느낌도 들고 해답을 알고 계시는 데 말씀 안 하시는 듯 하다.

[하트 모양이에요. 잠자리들이 저런 모습인 건 처음 봤어요]
[짝짓기 중이야. 쟤네들을 떼어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배가 불러와 산책 삼아 폭포 주변으로 걸어갔다. 폭포의 뒤쪽으로 동굴 입구가 보여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그리로 가려면 바위 몇 개를 지나고 숲 길을 따라가는데 그 길목에서 고추잠자리가 짝짓기 하는 걸 발견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또래 친구들과 제일 많이 한 일 중의 하나가 짝짓기하는 잠자리 떼어놓기였다. 수컷의 긴 꼬리가 암컷의 등 위로 굽어지고, 암컷은 약간 떨어진 상태로 자신의 꼬리를 수컷의 배 쪽으로 붙이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찌그러진 하트를 옆으로 눕혀 놓은 듯하다. 하여 도시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재미있어 한다.

  동네 개구쟁이 중 한 명이 날쌔게 손을 움직여 그들을 잡았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떼어놓자고 말한 뒤 암컷의 꼬리를 잡아당기자 깨 같은 작은 알들이 떨어졌다, 마치 물고기들이 산란을 하는 것처럼. 아내에게 말로 설명하느니 직접 보여준다고 손으로 잡아챘다. 어린 시절의 날쌘돌이가 실력 발휘를 해 한번에 잡으니 아내는 감탄 한다. 어깨를 으쓱하며 꼬리를 떼어내고 알을 보여주니 또 터져 나오는 탄성.

[맑은 알이 실처럼 붙어서 내려오네요. 너무 예뻐요!]

  난 참 단순하다. 누군가가 이런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니.

[아저씨는 정말 모르시는 게 없어요!]

  아내의 표정과 눈빛에 너구리 아가씨의 말이 떠올랐다. 헛기침을 한 뒤 잠자리를 놓아주고 다시 걸어 바위 두 개를 지났다. 폭포물에 머리와 어깨가 좀 젓었지만 몸을 비틀어 등을 바짝 대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폭포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이 전부여서 동굴 안은 침침하다.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어둠에 익숙해지고서야 안이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 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다가가 뚜껑을 열어보았다. 개망초 잎 말린 것, 개다래로 담근 술, 신선목 등이 가득히 담겨 누군가가 정성껏 모아둔 귀한 약재들이다.

[참 부지런하네요. 이정도로 모으려면 하루 이틀로 될 게 아닌데요]

  아내는 개다래주를 손가락에 묻혀 살짝 맛을 보며 감탄한다.

[여기서 뭐하세요?]

  동굴 안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너구리 아가씨다. 그녀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와 아내를 쳐다보았다.

[동굴 구경 왔다가..언제 왔니? 못 본거 같은데..]
[반대편에도 입구가 있어요. 그리로 다니니까 마주칠 일이 없네요]

  그녀는 다가와서 바구니에 약재들을 담는다. 아내는 그 옆에서 가만히 바라본다. 

[개다래주는 아저씨꺼에요. 언제든 드시고 싶을 때 가져다 드세요]
[내꺼?]
[네. 술 좋아하시는 거 아니까..기왕 먹는거라면 몸에 좋은 거 드세요]   

  너구리 아가씨는 아내에게 목례를 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나보다 더 인간적이다.

  집에 돌아와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일을 한 뒤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잔다고 들어가고 나는 마당을 빙글빙글 돌다가 개다래주 생각이 났다. 곧 야심한 밤이라 숲속을 혼자 가는 게 꺼림칙하지만 술꾼이 달리 술을 마다하겠는가. 잠깐의 고민스러운 마음을 접고 빈 병과 술잔을 담은 가방을 매고 길을 나섰다. 밤의 숲은 낮과는 다르다. 고고하고 아름답지만 어둠 속 어딘가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소리들이 가득 존재한다. 시골에서 자란 나도 처음 듣는 소리들이 등 뒤에서 다가올 때면 온 몸의 털이 일어나는 기분이다.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려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다.  

[윽~]

  뒤를 돌아보던 차에 발을 헛디뎌 왼발을 삐끗했다. 다시 걸음을 내딛는데 발목이 시큰하다. 괜히 나왔다고 자책을 하는 와중에 비가 온다. 한 방울, 두 방울 이마에 떨어지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아픈 발목을 끌며 바위 두 개를 지나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손전등을 가져올 생각도 못한 내 성격을 탓하며 더듬더듬 기다시피 전진했다. 손끝에 차가운 항아리가 만져진다. 하나, 둘, 셋. 낮에 본 그 항아리들이 맞다. 뚜껑을 더듬어 열었다. 확 밀려오는 잘 익은 술 냄새. 바닥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나왔다. 심하게 긴장했던 몸이 술 한 잔에 풀린다.

[어이~나도 한 잔 줄텐가?]
[나도]
[나도]
[나도]

  어둠 속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술을 청한다. 술잔이 하나뿐이라고 대답하니 둔탁하게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밤에 여기서 뭐하시나요?]
[천렵나왔어]
[아..네..]

  너무 깜깜하여 그들의 생김새를 전혀 알 수 없다. 너구리들이 둔갑했거나 또 다른 동물일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다만 그들은 비를 맞았는지 축축하고 찬 느낌이다. 술을 따라주느라 살짝 스칠 때면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다.

[안주도 없이 먹으려니 심심하네]
[나도]
[나도]
[나도]

  누군가 한 명은 제대로 말을 하는데 나머지는 메아리처럼 같은 말만 한다. 조용히 입 다물고 마시기만 하자니 할매들이랑 먹던 때가 그립다.

[우리..안주 삼아 먹을까?]
[나도]
[나도]
[나도]
[네? 뭘 먹으려고요? 술 뿐인데요]

  바닥에 술잔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스스스스 다가오는 느낌. 사람이란 어떤 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왠지 모르지만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옆으로 몸을 굴렸다.

[에이..]
[나도]
[나도]
[나도]

  그들의 안주감은 나인게 분명하다. 술잔이 반대편으로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뒤로 기어나갔다. 다가오는 그들을 신경쓰며 서둘러 나오다보니 폭포를 피하질 못하고 떨어져버렸다.

[아저씨? 정신 좀 차리세요]

  물에 빠지는 순간 허우적대다가 기억을 잃었던 것 같은데, 너구리 아가씨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들어 쳐다보니 나는 바위에 누워있고 그 옆에 너구리 아가씨가 있다. 푹 젓은 얼굴과 팔에 생채기가 잔뜩 나있다. 그녀의 다리에선 피도 흐른다.

[큰일 날 뻔 했어요. 제가 못 봤으면 아저씨는 영영..]
[고맙다]
[이 밤에 여긴 왜 오신거에요? 위험하게..]
[그러게..너 다리는 괜찮은 거니?]

  피를 닦아주려고 일어나는데 왼쪽 숲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가 나타났다. 다가와서는 말없이 아가씨의 팔을 잡아끈다. 가기 싫다는 아가씨와 가야한다는 언니의 신경전을 보자니 미안한 기분이 가득하다. 결국 너구리 아가씨는 언니의 손에 끌려 다리를 절뚝이며 사라졌다. 가면서도 아저씨 다음에 봐요..를 외친다. 점점 내게 다가오는 그녀에 대해 고민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숨을 안 쉬는 자들이요]

  몇일 뒤에 만난 도토리묵 장수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신기한 인물이니 알고도 남음이라 역시나 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여긴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네요]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여긴들 특별할라고..]

  도토리묵 장수는 팔다 남은 거라며 내 손에 따뜻한 호빵을 쥐어주고 갔다. 한 낮의 더위에 파는 호빵이라니..그는 또 뭘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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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한마디: 제가 실수로..제 글을 지웠습니다..하여 다시 올립니다.--;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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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10-0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님~어쩌다 그러셨어요.ㅎㅎ 제가 늦게 들어와서 다행이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최현진 2009-10-08 15:3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제가 오타를 발견하여 수정을 한다는 게 그만 삭제를 했네요..덤벙대서...

한낮의사람 2009-10-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렵..처음 듣는 단어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어요. 오봉도요. 문득 작가님의 나이가 궁금합니다. 이런 단어들을 아시는 걸 보면..생각보다 많이 드셨을지도?

최현진 2009-10-08 15:33   좋아요 0 | URL
인터넷 검색까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