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동안의 폭우로 학마을 곳곳에 문제가 발생했다. 버버리 할배네는 모내기를 해놓은 논에 물이 넘쳐 일 년 농사를 망쳤고, 청산 할매네 축사는 뒷 산에서 무너져 내린 흙 때문에 허물어졌다. 게다가 수로도 곳곳이 넘치고 막혀 물이 범람했다. 마을 복구 작업이 오늘에야 시작이 되었는데, 문제는 학마을 주민의 99%가 여자라 나와 버버리 할배가 바쁘게 뛰어다녔다. 또다시 비가 쏟아지면 이제는 마당 정도가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권선생, 욕 봤어]
마지막으로 개울 쪽에서 연결되는 수로를 확인하고 올라오는데 슈퍼 주인 할매가 공짜 씨껍데기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파김치처럼 푹 젓고 지쳤을 때 마시는 차가운 술 한 잔. 이건 억만금을 주어도 못 바꿀 맛이다.
[크..할매, 고맙습니다]
[아녀. 또 일할게 있남?]
[청산 할매네 축사를 고쳐야 해요]
[고맙구만, 고생해]
축사는 원래 통나무로 지었던 건물인데 나무를 새로 구하기가 어려워 부러지지 않은 것은 재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버버리 할배의 가르침에 따라 축사를 고치려고 벽에 매달렸다. 한 쪽에서는 할배가 작두로 짚을 자르신다. 작년에 잘 말려둔 것인데 다행히 비에 젖지 않았다. 이 짚과 흙을 섞어 바르면 짚이 마르면서 흙과 엉켜 단단하게 고정된다.
[이정도면 될까요?]
[아녀, 권선생 키 만큼 올려야돼]
계속 손을 위로 든 채 일을 하려니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팔이 부르르 떨린다. 9살 무렵부터 대도시에서 살아 힘든 일을 한 일이 없으니 60이 넘은 어르신보다도 먼저 지치는 문제가 생긴다.
[부석사 쪽도 물난리가 났데요]
[거기만 그렇겠나, 상석리는 과수원이 망가졌어]
[오다 보니까 뜬 바위 뒤 쪽도 난리가 아니드만]
너구리 아가씨가 괜찮을지 걱정된다. 아무래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내가 저 만치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둘이 잘 되가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사람이 아파서 요양 겸 같이 있는 거죠]
[색시가 참하게 생겼는데, 웬만하면 권선생이 지고 들어가. 사는 게 뭐 있남. 자식 낳고 살면 정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
어르신들은 우리의 이혼 사유가 일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신다. 만약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이혼을 안 했을까? 아내는 자살 시도를 포기 했을까? 나도 모르겠다.
마실 나온 아내와 함께 마을을 돌아본 뒤 집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뭔가를 먹도록 차려주고 나서 산길로 들어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또 다시 비가 쏟아지려는지 잔뜩 흐리다. 부석사 근처는 할매의 말대로 산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고, 물에 쓸려 구멍이 생긴 곳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절이라 여기저기 문제가 많이 있을 것이다. 다들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뒤쪽으로는 사람이 안 보인다.
너구리 아가씨를 큰 소리로 불렀다. 몇 번을 불렀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어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여기는 웬일이세요?]
한참 만에 보는 얼굴인데 수척하고 지쳐 표정이 어둡다.
[괜찮은가 보려고 왔어]
[정직하게 말하면..나빠요, 상황이..]
한 때는 동굴의 입구였던 부분이 무너져 내린 흙과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언니네서 좀 전에 돌아와보니 이래요]
너구리 아가씨는 혼자 해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었던 듯 옷이 흙 천지였다. 손이 엉망인 게 장갑도 없이 일을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다그치듯 말했다.
[왜 이런 험한 일을 혼자 하려고 해? 아직 비도 완전히 안 그쳤는데 더 큰 사고라도 나면 어떻하려고!]
[도와달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한참동안 땅을 보던 너구리 아가씨는 작게 중얼거렸다.
[부탁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쉰 뒤 바닥의 나무를 들어 옮겨 놓았다. 흙을 떼어내고 온갖 부스러기들을 치웠다. 그녀도 옆에서 함께 일을 한다. 깨금발일 때의 움직임, 끙끙거릴 때의 소리, 땀이 흘러 손으로 닦아내는 모습이 일을 하는 내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쉬어가면서 해]
[도자기들이 망가졌을까봐 걱정되요. 엄마가 주신건데..]
너구리 아가씨에게도 엄마가 있다, 내게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이럴 때면 그녀가 사람으로 느껴진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거나, 수줍게 말하거나, 엄마를 그리워하는 음성을 들으면 정말 그녀가 사람인 것 같고, 사람이면 좋겠다는..그런 생각들이 파도처럼 다가온다. 이런 마음은 친구가 되는데 도움이 안 되니 어디론가 보내버려야 하는데 매 순간 사라졌는가 싶어 안도하면 어느새 옆에 있다.
[위쪽이 뚫렸어요!]
겨우 머리 하나 들어갈 정도인데도 너구리 아가씨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항상 긍정적이고 감사해하는 성격이라 뭔가를 같이 하면 나도 즐겁다.
[뭐가 보여?]
[아니요, 완전히 깜깜해요]
더 빨리, 더 열심히 일한다. 내가 벗어준 장갑이 큰지 추스르면서도 이리저리 움직인다.
[도와드릴까요?]
갑자기 뒤에서 젊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풍년 기원 의식 때 본 사람들이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너구리 아가씨가 손을 흔들며 고마워하니 머쓱해진다. 장정 셋이 달려들어 도와주니 10배는 속도가 났다. 동굴의 입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 너구리 아가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침내 동굴의 입구를 대각선으로 가로막고 있던 큰 나무 조각을 떼어내니 생각 했던 것보다는 안이 덜 망가졌다.
[고맙습니다]
젊은 너구리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언제든 부르라고 한 뒤 사라졌다. 나도 그만 가야하는데 너구리 아가씨를 두고 가기가 내키지 않아서 어정어정 거렸다.
[배고프지?]
[네]
[뭐 먹으러 가자]
비가 완전히 그쳤지만 어두운 밤이다. 부석사 쪽으로 걸어가면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고 가끔씩 들리는 작은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8시가 넘었지만 부석사가 한창 수리중이어서 인부들이 밥을 먹고 쉴 수 있도록 음식점 하나가 문을 열어두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도토리묵을 시켰다.
[오늘은 어디서 잘거니? 동굴 안이 좀 그렇던데..]
[언니네 갈거에요]
[여기서 멀어?]
[제 걸음으로 20분 정도요]
[데려다 줄게]
[혼자갈 수 있어요]
도토리묵을 두 접시 째 시켜 먹으면서 우리는 옥신각신한다.
[혼자 갈래요]
[안 돼]
음식점을 나오자마자 도망칠까봐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집에 가보셔야 하잖아요. 아픈 사람은 혼자 있게 하면 안 돼요]
[자고 있을 거야. 신경 쓰지 마]
숲속에 들어서자 그녀는 멈추어 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러면..친구가 되기 힘들어요]
[오늘 밤은 친구하지 말고 내일부터 하면 되]
또 다시 한 숨. 이제야 더 이상 타박하거나 거절하지 않는다. 벌레 소리가 없는 길을 걸어가자니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혹시 걱정하셨어요?]
[그래. 넌 덤벙거리잖아]
[언니도 아저씨도 다들 걱정하게 만들었네요. 어쩌면 하늘에 있는 엄마도..]
[분명 그러실 거야. 물가에 내 놓은 애 같아서..]
[애라니요! 저 어려 보여도 여자라고요!]
[그래 여자다! 누가 뭐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더니 싫다는 듯 째려본다.
[제일 처음에는 아저씨가 거인 같이 커보였어요]
[그래?]
[근데..푸쉬쉬쉬쉬..김이 빠지더니 지금은 요만해져서..]
[요 녀석이..]
김이 빠지고 키가 점점 작아지는 흉내를 낸다.
[아저씨..그 분 사랑하세요?]
[예전에는..사랑했었어]
[지금은 뭐에요?]
[연민, 슬픔. 여러 가지가 얽힌 마음..]
[사람이란 복잡하네요. 우린 좋다, 싫다면 되는데..]
[그러 길래 뭐 하러 나랑 어울리니..]
언덕길을 통과하자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인다. 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언니가 문 앞에 나와 있다고 하면서 혼자 간다고 손을 놓았다.
[여러 가지로 감사했어요]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한다.
[그런 말은 안 해도 되]
[먼저 갈게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녀는 돌아서서 뛰어간다.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 손에는 아직도 그 작은 온기가 남아 있어, 한 번 더 돌아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멈추어 서서 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바라본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일까..혹시나 사랑하고 있다는 말일까..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마침내 그 희미한 불빛마저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간간히 돌아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