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부지런히 집안 대청소를 한다. 평소에는 한 번도 안 치우던 건넌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환기를 시켰다. 물걸레를 들고 3번이나 훔쳤는데도 여전히 먼지가 나온다. 사실 돌아온 뒤에 청소를 한 번도 안 했으니 이정도인 게 감지덕지다. 나는 내 방과 대청마루, 부엌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건넌방은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아내가 내려오기로 해서 불편하지 않게 준비를 해야 한다.

  어제 저녁에 아내는 잠시 내려가 있고 싶다며 전화가 왔다. 이 마을에 있는 빈 집에 살겠다고 하는 걸 건넌방을 쓰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어떤 마음이 남아있어서라기 보다는 아직 안 좋은 상태의 사람을 귀신 나올 것 같은 빈 집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선생도 참 신기한 사람이야]
[네?]
[둘이 그래 살꺼면 다시 합치지 뭐땀시 각 방이야]

  청산 할매는 안 쓰는 이불과 요를 가져가 쓰라며 나를 부르시고는 한마디 하셨다. 어르신들에게는 이상한 상황임을 알기에 그냥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점심이 지나고 나니 택시 소리가 나며 집 앞에 아내가 내렸다. 무거운 짐 가방을 건넌방에 넣어주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얼굴 살이 많이 빠져 아파 보였다.

[고마워요]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니까 편하게 해. 요나 이불은 옆집 할매껀데 혹시 싫으면 내일 장에 가자]
[아니에요. 엄마꺼랑 비슷해서 좋아요. 의사가 공기 좋은 곳에서 좀 쉬라고 해서 내려온 거예요]
[그래 잘 왔어. 푹 쉬면서 머릿속을 비워. 저녁에 고기 구워 먹자]

  아내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 2년차쯤엔가 우울증이 매우 심해졌다. 그녀는 여리고 감성적인데다 소심한 구석이 있어 감정 기복이 잦았다. 결혼할 때는 그것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로 그저 잠시의 일이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생각하고는 거의 매일 늦게 들어왔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방치를 한 게 화근이란다. 중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편해보여도 학부모나 아이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한 데 나는 그것을 바로바로 떨쳐내는 반면,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아내는 마음속에 쌓아 놓아 결국 극단적인 일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쯤 우리의 결혼도 더 나아갈 길이 없을 정도로 표류 중이었다. 이런 저런 치료 프로그램을 다녀도, 부부관계 개선 프로젝트를 참가 해봐도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다. 뭔가 더 깊은 혹은 근원적인 부분에서 병의 뿌리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1년 후에 이혼을 했다. 그녀가 강력히 원하여 이루어진 일이라지만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나쁜 일은 같이 오는 법인지 교사로서 큰 치명타가 되는 학생의 사고와 죽음이 이어져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떠돌다 학마을에 내려온 것이다.

  찐 고구마를 먹으라고 방문을 열었다. 역시 그녀는 곤히 잔다. 우울증 약이란 게 부작용으로 잠이 오는지 가끔 잘 시간이 아닌데도 시체처럼 늘어진다. 그녀의 머리맡에 고구마가 담긴 쟁반을 두고 나왔다. 대청마루에 앉아 수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안사람 줘. 기가 허하면 아픈 법이야]

  청산 할매는 산에서 캐온 것이라며 알싸한 향이 나는 약초를 주고 가셨다. 5시간 정도 잘 다린 후 먹으면 한결 몸이 가뿐해 진다고 하셨다. 나는 다락에서 약탕기를 찾아와 깨끗이 씻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한약방에 들어가면 나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책을 들고 그 옆에 있자니 어머니가 주시던 활명수와 환약이 생각났다. 6살 무렵에 배앓이를 할 때 활명수와 환약을 먹었다. 그 톡 쏘는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그 뒤로 그게 먹고 싶으면 거짓말로 아프다고 바닥을 뒹굴었다. 입으로는 활명수, 활명수 했으니 거짓말을 아실법도 한데 막내인 나를 끼고 사셨던 어머니는 그 때마다 꼭 활명수를 구해오셨다. 그 당시 스케치북이 5원이고 활명수가 25원을 했는데도 형들 준비물은 못 사줘도 반드시 활명수는 가져오셨다. 며칠에 한 번꼴로 활명수를 입에 달고 사니 그것 때문인지 배가 뽈록 나왔다.

[저녁 먹어야 하니까 일어나]

  해가 넘어가는데도 소식이 없어 흔들어 깨웠다.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일어났다. 그녀는 수돗가에서 나물을 다듬고 나는 상을 차렸다. 고기를 구우려 불판을 데우고 한 점씩 올려서 굽자니 그녀도 과거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우리 예전에 종종 해먹었는데..그 때 같아요]

  봄밤에 우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소리와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한다. 마치 아프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다음날 우리는 영주 시내에 다녀왔다. 얼마 동안 있든 기본적인 도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김에 대형마트까지 가게 되어 차에서 내릴 때는 비닐봉지가 3개로 불었다. 아내와 내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데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너구리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소리를 들은 듯 벌떡 일어난다. 나는 마당에 잠시 멈추어 섰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옆으로 다가가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아내는 목례만 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는 아내의 방문이 닫힐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내가 냉장고에 사온 것들을 넣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자 따라와 도와준다. 

[같이 사는 거예요?]
[응]
[두 분..다시..결혼하세요?]

  너구리 아가씨는 설거지를 해준다며 등을 돌린 채로 물어본다. 나는 냉장고 문을 잡은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지금은 저 사람이 아프기 때문에 도와줘야 해]

  어떤 말이 들려올 지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부엌엔 나 혼자였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패턴이 바뀌었다. 울산댁네 장 닭이 와서 울고 나면 날이 더워지기 전에 아내와 마실을 나간다. 그리고 약초 같이 진한 향의 산나물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다시 숲 속 산책을 간다. 잠들기 전에 방에서 혼자 반주 한 잔. 이것이 요즘 모습이다.

  너구리 아가씨는 그 이후로 몇 일간 안 오다가 어제 약초가 가득 든 바구니를 가져왔다. 아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다려준다고 약탕기를 손에서 뺏어갔다. 그녀가 약탕기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는데 아내가 건넌방에서 나왔다. 아내 역시 약탕기 근처에 자리 잡았다. 두 여인은 마당에, 나는 대청마루에 앉은 채 시간이 흘러간다. 침묵이 무거운 건 나만의 일인지 둘은 시종일관 묵묵히 약탕기만 본다. 결국 나는 둘을 남겨두고 숲 속으로 도망쳤다. 다 허물어진 사당 앞에서 청산 할매의 어머니와 함께 도토리묵을 먹었던 희미한 기억을 곱씹었다. 바람이 서늘해질 때까지 나무 앞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둘은 약탕기를 보고 있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너구리 아가씨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약탕기를 내려놓고는 사라졌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또 아내는 왜 아무 말도 없을까.  

  너구리 아가씨는 다음날도 약초를 가져왔다. 또 그 다음날도. 그녀는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매일 환약을 가져왔던 것처럼 아내를 돌보려고 노력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저녁에 너구리 아가씨를 마중하려고 같이 걸었다. 그냥 가게 두면 비를 맞을 테니 씌워주고 싶었다.

[언제까지 약초를 가져올 거니?]
[나을 때까지요]
[만약에..오래 걸리면?]
[계속 가져올 거예요]
[이건 감기 같은 게 아니야. 네가 떼어낼 수 없어]
[사람의 병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 아프시면 아저씨가 힘들잖아요. 두 분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도와주고 싶어요]

  비가 좀 더 세졌다. 갈림길에 도착해 너구리 아가씨에게 우산을 주었다. 그녀의 모습이 멀어져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점이 공중에서 자취를 감출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저씨..우리 친구할까요?]
[그럴 수 있겠어?]
[아마도요]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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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09-3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들어오질 못해서..올 때면 몰아서 봅니다. 다음회가 궁금해집니다. 작가님 좋은 추석 되세요.

최현진 2009-09-30 13:10   좋아요 0 | URL
해피님도 추석 즐겁게 보내세요. 신종플루 조심하시고요.

우주바다 2009-10-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나 너구리아가씨나 참...
잘하세요..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주면 책임이 따르죠..그렇다고 마음을 어떻게할수있는건 아니지만..
추석잘보내세요..저는 안동에 내려갔다올꺼예요..

최현진 2009-10-01 15:08   좋아요 0 | URL
우주바다님...추석 행복하게 보내세요~~안동..다음에 놀러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