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사람들이 낮에 쉬거나 낮잠을 자는 건 뙤약볕에서 계속 일하면 일사병이 생기기 때문이다. 해서 새벽부터 점심 전까지 일하고, 밥 먹고 쉬었다가 약간 해가 늘어지면 다시 움직인다. 나도 그런 생체 리듬이 생겨 아침과 저녁에만 소소한 일들을 한다. 마당의 풀도 일어나자마자 뽑고, 글쓰기도 저녁에 한다. 지난번에 출판사 후배가 내가 쓴 중고등학교용 참고서가 반응이 좋다며 다른 것도 요청하여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혼자 꿈이긴 하지만 이러다 학습지 계의 대부가 될 날도 오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모두들 한 낮에는 쉬자는 주의다.

[덥다.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을까?]

  점심밥을 먹고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보자니 7-8월도 아닌데 이상하게 후끈하다. 기상 변화가 학마을에도 전이되었나 봄이 봄 같지 않다. 목도 마르고 땀도 나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는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슬리퍼를 끌며 집을 나와 정자가 있는 큰 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할매들의 고스톱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울산댁 할매가 돈을 땄는지 한 턱 쏘라고 하신다. 그 소리가 정겹고 즐거워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건너갔다.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 왕복 2차선 도로 앞에 있는 슈퍼에 도착했다.

[할매, 아이스크림이 너무 없네요]
[이가 시려서 먹는 사람이 없어. 왜?]
[너무 더워서..]
[옛날처럼 아이스케키 장사가 오면 좋을텐데..]

  이 슈퍼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할매와 할배 뿐이니 과자나 아이스크림 같은 대도시에서 잘 팔리는 품목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유통기한을 지난 것 뿐이다. 그나마 젊은 사람인 나도 안 찾으니 슈퍼 주인 할매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 버리지 않고 두었을 뿐 딱히 새로 들이시려고 안하신다. 

[오늘이 초여드래니까 쪼매만 있어봐라. 식품 장수가 올꺼야]

  학마을처럼 산으로 둘러쌓인 동네에는 아직도 떠돌이 장수들이 온다. 내가 어릴 때는 봄가을엔 생선 장수, 여름엔 아이스케키 장수, 그리고 계절을 안 가리고 찾아오는 소금 장수와 엿 장수가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소금 장수가 제일이라지만 아이들은 엿 장수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달짝지근한 음식이나 과자가 원체 없다보니 엿 장수의 가위질 소리만 들리면 온 동네 문이 벌컥벌컥 열리며 다 뛰어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나타나는 애들을 보면 고무신을 들고 있기도 하고, 깡통부터 놋그릇까지 별것이 다 가져온다. 엿을 먹고 싶은 마음에 물물교환을 하려는 것이다. 엿 장수 할배는 나무통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가져온 물건을 감정하셨다. 몰래 들고 나왔구나 싶은 좋은 품목들은 도로 가져가게 하시고 없어져봤자 조금 두들겨 맞을 정도의 고물만 자루에 담았다. 그렇게 심사를 통과한 아이들은 웃고, 못 먹게 생긴 놈들은 표정을 구기며 엿 통만 바라본다. 엿 장수 할배는 드디어 아이들 앞에 넓고 평평한 나무통을 옮겨 놓으며 싱긋 웃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인다. 할배는 허리춤에서 철주걱을 꺼내 긴 엿 위에 올린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춰 짤랑거리던 가위로 철주걱을 탁탁 내리친다.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이면 엿은 예쁘게 3-4등분이 난다. 서로 달라붙지 말라고 밀가루를 뿌려 손에 올려주면 아이들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지르면서 숲 속 어딘가로 뛰어가 버린다. 물물교환이 끝났으니 도로 받아오라고 어른들이 야단치기 전에 엿을 먹어버리려는 심산이다. 나 역시 그렇게 우리 집의 온갖 물품을 가져다주며 엿을 엄청 챙겼다.

  나는 옛 생각에 빠져 슈퍼 앞에 내 놓은 의자에 앉아 오래된 듯 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단팥 맛이 난다. 점심을 막 넘어 해는 중천이고 길은 아스팔트의 지열 덕에 슬리퍼가 달라붙는다. 이런 날 식품 장수가 다닌다니 무엇을 가지고 올지 기다려진다.

  근처에 바닷가가 없는 학마을은 제사에 문어를 올리려면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 사와야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먹어보는 문어는 쫄깃쫄깃하기로 치면 천상의 맛이었다. 그러나 그건 손꼽을 만큼 어려운 일이니 대신 생선 장수가 들릴 때 먹는 고등어가 최고다. 봄이나 가을에만 오는 게 생선은 쉽게 상하고 장수들이 가지고 다니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주로 간을 해 오래 보관이 가능한 생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흔하고 싼 고등어는 학마을 인기 메뉴였다. 대부분의 떠돌이 장수들이 그렇지만 각 마을에서 선호하는 물품을 따로 포장하여 가지고 간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주문 받으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에 올 때 가져왔다.

[할매, 식품 장수가 오면 장사가 안 돼서 곤란하시잖아요]
[그래도 여기 없는 건 거기서 떼어다 팔아. 안 그럼 시내까지 나가야하는데, 힘들어]

  도로 저편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 아른거리는 파도 속에 파란 트럭이 다가온다.

[저 오네]

  슈퍼 주인 할매가 더 반가워한다. 왠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고 일어나니 파란 트럭은 회전을 하며 마을 다리를 넘어섰다. 이런, 떠돌이 식품 장수는 도토리묵 장수다. 그는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정자 앞에서 차가 멈추고 그가 내려서는데 옷차림도 주머니가 많이 달린 장수들용 조끼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래도록 이 일에 매진한 사람으로 보이겠다. 그는 빨간 확성기를 들고 식품이 왔다고 구성지게 말했다. 집에서 한 숨 자던 할매들이 하나 둘씩 몰려든다. 지갑을 들고 있는 분도 있고 파와 감자 같은 것들을 들고 나오시는 경우도 있다. 봄에는 시골에 돈이 말라 어려울 때라 옛날 방식의 물물교환을 한다. 도토리묵 장수는 장부를 확인해가며 부탁 받은 물건을 꺼냈다.

[청산 할매는 물받이용 큰 대야, 맞죠?]
[고마워]
[칼은 울산댁 할매꺼네]

  다들 급식을 받듯이 기다리다가 돈을 주거나 가져온 농산물을 건넸다.

[굴비 좀 줘]
[요건 얼마야?] 

  그는 하나하나 요령 좋게 처리하며 트럭 여기저기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주었다. 1톤 트럭이라 크지도 않은데 천장에 간이 칸막이를 달아 100% 활용한다. 진짜 아주 오래 이일을 한 사람 같다. 나는 딱히 무엇을 사려하기 보다는 그 풍경을 구경하였다. 고작해야 20-30분의 일이지만 참 재미있다. 가끔 가는 장 구경보다 좋다. 그는 모든 할매들이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슈퍼에 도매 가격 정도로 넘겨주는 물품들을 내려놓았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 텐가?]

  그는 땀이 흐르는 목을 수건으로 닦으며 슈퍼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아이스크림 대신 씨껍데기 막걸리 한 잔을 요청했다. 나는 청하지도 않았지만 건너편에 앉았다. 그는 나를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묵은 안 팔아요?]
[그건 밤에 하는 일이지]
[밤에 누가 산다고..]
[거기도 사고..저기도 사고..살 사람이야 많지]

  우리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겁게 한 잔씩 비웠다. 운전을 해야 하니 술은 이이상 안 먹겠다며 자르는 게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너구리네..]
[거기도 물건을 팔아요?]
[사람 사는 동네나 거기나 먹고 쓰고 하는 건 같지. 궁금하면 따라오든지]

  너구리들도 애용한다는 게 호기심을 유발했다. 지난해에 너구리 아가씨네 언니가 학 알을 달라며 가져온 돈이 나뭇잎이었다는 게 밝혀져 기함을 토했었는데, 그런 나뭇잎을 받고 물건을 주는 건가 싶어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안돼요! 안돼요! 이러지 마세요~]

  그와 함께 다시 트럭에 오르자 인기 가요라며 크게 틀었다. 산 속의 호젓한 길에는 인적이 전혀 없어 트럭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장윤정의 구성진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는 길들을 한 참 가더니 마침내 시동을 끄고 볼륨도 줄이며 멈췄다. 그는 빨간 확성기로 식품 장수가 왔음을 알렸다. 너구리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기어올지,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올지 궁금해 하며 기다리자니 풀 숲이 흔들렸다. 나무 가지를 젓치고 오는 게 사람의 모습이다. 아마도 대낮이니 누군가 지나가다가 볼지도 모르겠다 싶어선가 옷도 계절에 맞게 입었다.  

[이건 지난번에 부탁한 양배추와 알타리 무]

  처음 보는 여자는 고맙다고 하며 팔뚝만한 더덕을 두어 뿌리 내놓았다. 또 다른 남자는 약초를, 할매는 상황버섯을 준다. 그들은 모두 돈 대신 구하기 쉽지 않은 상급의 채집품들로 물물 교환을 하고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면 되]

  그는 받은 것들을 한 쪽에 넣더니 다시 트럭을 운전하였다. 10여분을 더 가 도착한 곳은 기와가 좀 엉성하긴 하지만 상엿집보다는 낮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 둘이 나왔다. 너구리 아가씨와 그 언니다.

[어! 아저씨~]

  그녀는 반갑다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뒤에 서 있는 언니는 고개만 까딱한다. 나에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테니 나 역시 눈만 마주치고 말았다. 

[왜 여기 있니?]
[언니네 집이에요. 어제 놀러 왔어요]

  언니는 집에 들어가더니 청자로 된 밥그릇과 뚜껑을 들고 나왔다. 이 집은 도자기로 물물교환을 하는 모양이다. 도토리묵 장수가 나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하여 들고 있자니 참 아름답다. 밥그릇을 따라 음각으로 국화 문양이 보이고 그 주변에 가느다란 실선이 화려하게 살아 움직인다. 뚜껑에는 잠자리와 물고기가 반짝 거린다. 아마도 이름이 청자 상감 잠자리 물고기 무늬 밥그릇 정도 되겠다.

[그거 굉장히 예쁘죠? 전 불빛에 비추어 보는 게 좋아서 주기 싫은 데, 언니가 이번엔 비싼 걸 부탁했데요]

  너구리 아가씨는 발로 흙을 툭툭 치며 말했다. 마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동생에게 줄 때 같다. 트럭에서 한참을 내려오지 않던 도토리묵 장수는 끙끙거리며 아이스박스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 과연 무엇이 들었기에 힘 좋은 그가 고생하는지 궁금하다. 그에게 도자기를 건네고 살짝 열어보았다. 순간 얼굴에 비릿한 물이 튀겼다. 붉은 색과 흰 색이 섞인 화려한 비단 잉어들이다. 크기도 엄청 난 게 비싸보였다.

[이걸 왜?]

  어쩌면 실례일수도 있는데 호기심에 말이 툭 나와 버렸다. 

[형부 먹인데요]

  아하..사태 파악이 딱 된다. 언니가 얼굴을 붉히는 게 학 알 대용품이다. 아직도 발기부전이 해결 안 되었음이 분명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더니 집 안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혼자 하기 싫은지 도토리묵 장수가 도와달라고 하여 집 안으로 아이스박스를 들고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의 집인 동굴과는 다르게 제법 살만하게 보인다. 남편이 너구리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방도 있고 부엌도 보이는 게 일반 가정집이다.

[거기 놓고 가세요]

  쌀쌀하게 말하는 언니에게 너구리 아가씨가 눈을 흘기고는 나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다.

[언니가..요즘 예민해요. 다음 해가 지나면 애기를 못 났거든요]
[그런 게 정해져 있어?]
[음..나이란 게 있잖아요]

  어쩌면 너구리 아가씨도 보기와는 다르게 꽤 나이가 있을지도.. 나보다 더 먹었을까 싶어 그녀를 찬찬히 다시 보았다.

[왜요? 뭐 묻었어요?] 

[아니. 예뻐서..]

  얼굴을 확 붉히며 뒤로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찐다. 나는 웃으며 일으켜주었다. 이 정도의 농담은 정신 건강에 좋다고 속으로 변명하며,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도토리묵 장수의 트럭에 올라탔다. 그녀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 하였다. 마침내 일일 식품 장수 체험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찬 물로 몸을 씻으며 그가 준 문어를 초장에 찍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kdi 2009-09-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전에 바빠서 빨리 읽은 뒤에 다시 들어와 천천히 보았습니다.저 어릴 때는 그런 장수들이 없었지만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어서 기억이 새록새록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