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좋은 이유는 천지에서 약동하는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집 마당의 잡초들도 다시 머리를 내밀었고, 수로 주변에는 봄나물들이 쏙쏙 올라와 신기하다. 집 주변에만 해도 쑥, 달래, 냉이, 땅두릅들이 있다. 특히 두릅은 땅에서만 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무에도 순처럼 달려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외국산 나무이거나 가시 없는 파인애플이 달렸다고 하겠다.
[저것도 두릅이라고요?]
[나무에 달린건 나무두릅이라고 해.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닭고기보다 더 맛나]
학마을은 봄 동안에 매일 정자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다. 농사 준비를 하느라 바쁘지만 지금이 제철 나물을 먹기에 가장 좋아 어르신들이 돌아가며 밥상을 준비하신다. 사실 상차림이라고 부를 것도 없을 만큼 단출하다. 밥이랑 고추장, 된장찌개, 나물이 다다. 개중에는 나도 들은 적 없는, 도시 사람은 모르는 나물이 더 많다. 이곳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는 놀러 다니느라 끼니는 후다닥 먹었고, 커서는 아내가 우울증 때문에 통원치료를 하느라 집안일에 신경 쓰기가 어려워 여전히 나물 이름은 알 기회가 없었다. 물어보니 오늘 점심에 먹은 것은 잔대나물과 비름나물이라는 데 좀 더 캐다가 먹고 싶다.
점심식사 후, 버버리 할배는 논을 정비하러 가시고, 청산 할매는 감자랑 고추, 깻잎을 심을 밭에 이랑을 만들러 출정하셨다. 이랑이라는 게 어떤 작물을 심을지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초보자가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고추는 물을 싫어하니까 높게 만들어줘야돼, 권선생! 그게 아니야]
허리가 굽으신 할매가 혼자 저 일을 언제 다 하겠냐 싶어 같이 나선 것인데 가만히 보니 오히려 일을 더디게 만든다. 내가 열심히 해 놓으면 할매가 엉덩이에 깐 포대자루를 밀고 따라와서 다시 손을 보시니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나을 성 싶다.
[할매, 저는 나물이나 캐오는 게 좋겠어요]
[그래주면 저녁 밥 맛나게 차리지. 후딱 다녀와]
역시나 그러시길 바라신다. 초봄이지만 햇빛은 여름 못지않게 따가워서 할매들이 쓰는 수건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릇과 과도를 들고 나섰다. 집 뒤의 사과나무 과수원은 천연의 나물 산이나 다름없어 멀리 가는 수고를 덜 한다. 슬렁슬렁 노래도 부르고 나를 따라오는 장군이와 장난도 치면서 걸어가는 데 저 위쪽으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뭐하세요?]
[거름 주고 있소]
도토리묵 장수다. 커다란 포대를 옆에 매고 저수지 근처의 나무 하나하나 마다 거름을 뿌린다.
[그냥 둬도 잘 자라지 않나요?]
[이렇게 하면 꽃과 열매가 더 풍성해져서 좋지]
포대 안을 슬쩍 보니 겨우내 만들어둔 퇴비다.
[밤에 풍년 기원 의식이 있는데 오고싶으면 오소]
[어디서요?]
[다리 앞 울산댁네 밭]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초봄에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중요한 의식을 치룬다. 일종의 춤인데 남자들만 참석한다고 귀띔해주었다. 남자들만의 의식이라..왠지 처음 보는 진기한 풍경일 거라고 상상하며 나물 캐기 작업에 들어갔다. 잘 자란 비름나물을 뽑으면서 내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아도 그게 무엇인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왜 모를까하는 의아함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이나 재미난 일들, 특별한 행사들은 빠짐없이 아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봄에 남자들만 참가한다는 의식은 처음이다. 결국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한 채 비름나물만 그릇에 가득 채워 집으로 돌아왔다.
밤 12시가 되기 전에 목욕재개를 하고 얇은 홑옷만 위 아래로 입고 집을 나섰다. 학마을은 어르신들이 일찍 잠드시기 때문에 지나가는 동안 불 켜진 집이 없었다. 내 빠른 걸음으로 몇 분도 안 돼 밭에 도착했다. 도토리묵 장수를 비롯하여 처음 보는 남자들 세네 명이 삽을 들고 서 있다. 삽질을 하려는 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달도 가려져 유난히 어두운 이 밤에 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돌아보니 버버리 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드셔서 빠지셨는지 그들도 기다리는 눈치가 아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다들 말없이 옷을 벗는다. 깜짝 놀라고 당혹하여 도토리묵 장수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모두들 웃옷을 다 벗었다. 하여 나도 벗었다. 그리고는 바지를 벗는다. 어쩔 수 없이 따라했다. 마지막으로 팬티도 발로 차버린다. 속으로 억..하는 심정이었지만 이제 발을 뺄 수도 없어 똑같이 발로 차서 한 쪽 구석에 떨어뜨렸다. 결국 우리는 알몸이 되었다. 나는 창피하여 몸을 어찌해야할지 난감했다. 목욕탕처럼 당연히 벗어야 하는 장소가 아닌데 건장한 남자들이 알몸으로 둥글게 서 있다는 건 초유의 사태인 셈이다. 그들은 전혀 창피하지 않은지 태연히 바닥에 내려둔 삽을 든다. 나는 가지고 온 게 없어 멍하니 보는데 도토리묵 장수가 한 개를 건네준다. 엉거주춤 삽을 잡고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흩어지더니 말없이 땅을 판다. 다섯 걸음 앞으로 가서 두 번 삽질을 하고, 또 다섯 걸음 내딛고 두 번 삽질. 도토리묵 장수 말처럼 일종의 춤이자 의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왜 풍년 기원 의식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동네의 밭이란 밭을, 논이란 논을 다 돌아다니며 삽질을 하고 보니 온 몸에 땀이 흐른다. 이래서 벗으라고 했나 싶다.
[밭에 씨를 뿌려준다는 의미요]
[씨?]
[작물이란 음양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니, 산신께, 하늘님께 좋은 씨를 많이 주시고 잘 자라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지]
[왜 알몸으로 합니까?]
[새 생명을 만들 때를 생각해보시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벗어두었던 옷가지를 들고 개울가로 향했다. 나도 그를 따라 갔다. 개울물에 발끝을 담그니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운에 쭈뼛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왼발, 오른발 번갈아 드는데 그는 차력사처럼 바닥에 앉았다. 다른 남자들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 닦는 스님의 자세로 물속에 입수했다.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발목 전체에 붕대를 감았다. 대신 그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지난번에 감사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발목의 붕대를 가리킨다.
[일전에..눈 내린 날..다친 저를 치료해주시고 보내주셨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 해 첫 날 우리 형제들의 옹노에 걸렸던 너구리였다. 그럼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니 다른 이들도 그런가 싶어 슬쩍 둘러보았다.
[네. 우리는 의식을 돕고자 내려왔습니다]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본 듯 대답한다. 벌써 3월인데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보니 그 때의 상처가 매우 컸음이 틀림없다. 나는 미안한 기분에 술 한 잔 하자고 초대했다. 그는 기쁜 표정을 가득 지었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술꾼들인지 술이라면 저렇게 행복해한다.
새벽의 해가 보일 무렵 울산댁네 장 닭이 신나게 울며 날아갔다. 좀 있으면 마을 어르신들이 나올 시간이라 하나 둘씩 옷을 입고 사라졌다. 나는 밤을 새고 나니 몸이 노곤하여 어서자자..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국화 농사 때도 그랬지만 팍팍한 노동을 하고 나면 잠이 잘 오는 법이다. 머리를 베개에 댄 후 숫자도 세지 않았는데 수마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아저씨~]
저녁이 되어 불판을 준비하고 상추랑 고추 등등을 수돗가에서 씻고 있는데 너구리 아가씨가 수로 너머에서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냉큼 들어온다.
[이거 제가 캔 거예요. 아저씨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그녀가 내미는 그릇 안을 보니 나물들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가득 담겨 있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 했는지 손이 새까맣다. 그래도 상대가 기쁘게 받아주면 고생이 다 잊히는지 내가 잘 먹겠다고 하며 받아들자 입이 귀에 걸리며 통통 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너구리 아가씨가 귀여워져 안아주고 싶어졌다.
[내가 너무 일찍 왔소?]
뒤에서 기침 소리에 이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토리묵 장수와 너구리들이다. 그들을 처음 보는지 아가씨는 내 등 뒤로 숨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쇠고기를 꺼내오라고 부탁하며 그녀를 부엌으로 들여보냈다. 너구리들은 동료임을 한 눈에 알고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뭐랄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짐승처럼 영역 표시를 하지는 않지만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은 한다고 생각하자 문득 너구리 아가씨에 대한 그런 눈길들이 반갑지 않았다. 술을 빼고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건배!]
발목을 다쳤던 너구리가 어색한 공기를 무마하려는 듯 잔을 들고 즐겁게 말했다. 다들 쨍 소리가 나게 잔을 부딪쳤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너구리 아가씨만 빼고는 다들 술과 고기를 번갈아 먹었다. 한 너구리가 그녀에게 속삭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살짝 웃는 너구리 아가씨와 가까이 붙어서 소곤거리는 모습. 겉으로 보기에도 대략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게 제대로 사귀면 이치에 맞을 성 싶다. 머리에서는 그것이 최선임을 알지만 내가 먼저 알고 지냈다는 유아기적 욕심이 마음에 검은 구름을 드리웠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이란 게 먹다보면 진화를 하는데 술 먹는 대상을 원숭이에서 호랑이, 뱀으로 만든다. 처음에 약간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 말도 많이 하고 퍼포먼스도 하다가 중간쯤 되면 으르렁 거린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몸을 배배 꼬며 땅을 기거나 누군가의 목을 확 졸라버릴 정도의 문제 행동이 나타나며 끝을 맺는다. 나는 지금 호랑이에 가까운 상태다. 평소 원숭이에 들어서면 딱 멈추고 잤는데 어찌된 셈인지 호랑이로 변신을 다 마치고 너구리 아가씨 옆에 앉아 있다. 도토리묵 장수가 슬쩍 쳐다본다. 그는 그만 마시라는 듯 술잔을 잡는다. 나도 한 힘 한다 싶어서 뿌리치려고 했는데 그는 바위처럼 꿈쩍도 안 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자 너구리들이 술잔을 내려놓고 잘 마셨다고 말한 뒤 싹 사라져버렸다. 이제 불 판 앞에는 나와 너구리 아가씨, 도토리묵 장수만이 있을 뿐이다. 뒤이어 그도 일어서더니 이정도면 충분하다며 남은 술을 수로에 부어버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초봄 하늘은 금가루를 뿌렸는지 별들이 빤짝인다.
[저도 그만 갈게요]
[가지마. 좀 더 있어]
오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나보다 더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하늘에 별이 참 많네. 네가 사는 곳에서도 보일까?]
[아마도요]
[너는..아직도 내가 좋으니?]
너구리 아가씨는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길을 느꼈다. 만약에 여기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그만 둔다면 어떻게 될까? 뛰어내리는 대신 빠르게 반대편으로 걸어간다면 상황이 좋아질까, 나빠질까? 별들조차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는 듯 무심히 반짝거리기만 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조만간 툭 떨어지겠다.
[늦었어요. 그만 가야겠어요]
잡혀 있던 오른 손을 빼내더니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나는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별만 바라보며 한 숨을 쉬었다. 그녀도 나도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