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봄이 온다는 소식을 등에 업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다. 밤새 요란한  꿈에 시달리느라 푹 자지 못하여 울산댁네 장 닭이 울기 전에 잠에서 깼다. 꿈에서 얼마나 달리고 숨었는지 입고 잔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무는 데 핸드폰이 울린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받기가 꺼려졌다. 왠지 안 좋은 소식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꿈 때문이려나 싶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이혼한 아내였다. 장모님이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잠시 어벙벙해져 아무 말도 못하다가 병원이 어디인지만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 돌아와?]
[5일 쯤 후에요. 상주를 맡을 사람이 없어요]

  집을 봐달라고 부탁도 할 겸 청산 할매에게 들렸다가 부리나케 차에 올라탔다. 장모님은 평소에 큰 지병이 없으시지만 오랜 식당일로 관절염 때문에 고생하셨다. 그래도 긍정적인 성격이시라 내가 찾아가면 불편한 몸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주시며 헤어질 때는 또 오라고 손을 붙잡고 있을 만큼 정 많은 분이었다. 그래서 이혼 후에도 혼자 찾아뵐 정도로 나 역시 그분을 좋아했다.

   아내는 무남독녀에다가 부모님이 모두 고아여서 병원을 혼자 지키고 있을 것이다. 운전 솜씨를 최고로 발휘하여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다. 역시나 아내 혼자 울며 앉아 있다.

[고마워요]

    나의 지인들과 형제들, 아내의 동료들, 어머님을 아시는 분들까지 추모객들이 계속 찾아와 나는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리고 발인..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목 놓아 울던 아내는 허토를 한 뒤 본격적으로 관에 흙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기절했다.

  그녀가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가고, 나와의 이혼 후에도 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 때문이다. 나 또한 그 분이 함께 계시기에 그녀의 우울증을 걱정하지 않았는데 다시 나빠질지도 모른다. 우리의 길지 않은 결혼 생활 동안에 그녀는 자살 시도를 했었기에 이제 잡아줄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 혼자 두어도 될지 걱정 된다.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집을 다시 줄이면서 그녀는 절망할 수 있다. 나는 장례식 내내 그런 걱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도 친구 혹은 같은 길을 갔던 동료의 마음이 커서 그녀의 검고 깊은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

[혼자 있기 싫으면 언제든 와. 힘들면 참지 말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장모님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배웅하지 않겠다며 현관문을 곧바로 닫았다. 그 단절된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녀가 지금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억지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예전에 의사가 해 준 충고였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부드럽게..거부감이 없게 다가가야 마음의 병이 치유된다.

  돌아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먼 느낌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은 생각과 걱정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근 일주일여 만에 돌아온 학마을은 다리를 지나가면서 둘러보니 무척 반갑다. 정자에 앉아 계시는 분들께 인사를 하느라 지체해 한참만에야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아저씨..아저씨..]

  대청마루에서 울고 있는 너구리 아가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로 너머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치고 힘들었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간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땀이 베인 뒷 목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린 뒤 마당으로 흘러가자 너구리 아가씨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벌떡 일어나 수로를 한 달음에 뛰어 넘어 내게로 돌진했다. 온 몸을 실고 매달리는 지 몸이 잠시 휘청한다. 그녀의 젓은 얼굴이 가슴에 닿았다.

[아저씨! 아저씨!]
[왜?]
[진짜 아저씨 맞지요? 그렇지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는다. 나도 덩달아 미소지었다. 그 순간 너구리 아가씨는 균형감을 잃었는지 헛발질을 해서 수로로 떨어졌다. 이 수로에서 장군이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야할 차례인 듯 하여 웃음이 나왔다.

[에취..에취..]
[더 가까이 오지 그래. 감기 걸리겠다.]

  그녀를 구한 뒤, 차가운 화로에 불을 지폈다. 동시에 연탄보일러도 활활 타오르도록 불구멍을 바짝 열었다. 그래도 일주일 가까이를 비워두었던 집이라 냉기가 가득 흐른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춘3월이지만 수로의 물은 아직 차가워 감기가 올 수 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 하나뿐인 이불을 꺼내와 덮어주고 화로를 대청마루로 내왔다. 그러나 너구리 아가씨는 가까이 오지 않고 대청마루 끝에 앉는다. 몇 번을 말해도 다가오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내나 너구리 아가씨나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다. 여자들이란 다 그런 건가..하는 생각도 스쳐간다.

[왜 울고 있었어?]  

[떠나신 줄 알았어요]

  아내처럼 무릎을 세우고 양 팔로 몸을 감싼 뒤 고개를 숙인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여행 가시는 거면 저에게 집 봐달라고 부탁하시지..] 

[장모님이 돌아가셨어]
[아..그랬구나..힘드시겠어요]
[응]

  달빛이 하얗게 내려와 창백한 너구리 아가씨의 팔을 비췄다. 나는 다가가 이불을 더 단단히 감싸주고 옆에 앉았다.

[너는..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니?]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타인의 마음을 아주 모를 만큼 둔하지도 않는데, 알면서 물어보는 내 진의가 더 의심스럽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한다.

[저는..제 위치를 잘 알아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나나 그녀나 지금 아슬아슬한 줄 위에 서 있다. 이 줄이 끊어질지 계속 이어져 둘이 마주칠지 현재는 모르겠다.

[찹쌀 떡~찹쌀 떡~]

  갑자기 너구리 아가씨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덕분에 우리를 감싸고 있던 불안하고 부담스러운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거..맛있나요?]

[먹어보고 싶어?]

[네. 하나 사주세요]

  이젠 너무도 익숙하여 누구인지 안다. 때와 상관없이 자기가 팔고 싶은 것을 파는 도토리묵 장수다. 그는 내가 부를 걸 먼저 알았는지 수로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예전에 도토리묵을 팔 때 들고 다니던 성능 좋은 목제 통을 가로로 매고 있다.

[맛있어?]

[네. 아주..아주요]

  눈물을 흘리며 먹는 찹쌀떡 맛은 어떨까. 너구리 아가씨는 굵은 눈물에 젓어드는 찹쌀떡을 한 입, 한 입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그녀가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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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09-2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이 배인 찹쌀떡..진짜 어떤 맛일까요?

우주바다 2009-09-2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흐린하늘과 부는바람에 습한기운이 가득한 아침입니다..오늘아침과 닮은 글을 읽으면서 마음한편히 짠해오네요..모두가 사는방법은 다르지만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며 살고싶어하죠..어쩌면 아내분이 훌쩍 짐을싸들고 학마을로 들어왔음하는 개인적인 바램이..혼자는 외로우니..주제넘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