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끝나간다. 소백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마을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매우 쌀쌀하지만, 마실을 나와 보면 가지들마다 새 잎의 순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걸어갔다. 

  우리 집은 마을의 가장 뒤에 있어서 몇 걸음이면 숲 속 산책로로 들어선다. 거기서 다시 5분을 더 가면 오른쪽은 산신의 사당, 왼쪽은 황주 할매네 논과 저수지다. 그 집 할배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드신 저수지인데 봄이 되면 벚꽃이 그 둘레를 전부 에워싸고 흐드러지게 피어서 사진 작가들이 촬영을 오기도 하는 절경의 장소다. 내가 학마을에 내려온 것은 6월이 다 되가는 늦봄이라 벚꽃이 한창일 때를 보지 못했다. 해서 올 해는 말로만 듣던 절경을 꼭 보겠다고 다짐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아직 좀 춥지?]
[네. 그러네요. 할매는 여기서 뭐하세요?]
[나물 좀 캘까하고..]
[쌀쌀해서 없는 것 같은데요]
[없기는..권선생이 여길 잘 몰라서 그러지 이르게 나오는 놈들이 꼭 있어]
 

  청산 할매는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는 과수원 쪽으로 간다며 발길을 돌리셨다. 영주는 "뜬 바위 사과"가 일품이라 두 집 건너 하나가 사과나무 과수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천지가 사과나무다. 저수지 위쪽으로도 한 때는 우리 집 땅이었지만 남의 손에 넘어가 지금은 사과나무 과수원으로 바뀐 곳이 있다. 일조량이 뛰어나 사과가 맛있는데, 할매는 그 햇빛 때문에 벌써 나물거리가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저녁에는 신선한 나물무침을 얻어먹겠다 싶어 군침이 돌았다.

  저수지에 도착하니 아직은 황량한 기분이 들었다. 저수지의 물이 탁하고 어두워 과연 뭔가가 살 수 있을까 싶고, 물가에는 잡초가 무릎을 넘게 자라서 수영금지라는 표지판을 곧 가리겠다. 게다가 영주시에서 도로를 새로 낸다고 저수지 옆쪽으로 표시용 붉은 깃발을 군데군데 박아 놓고 땅을 헤집어 놓아 전체적인 모양이 더욱 스산하다. 이래서야 올해는 벚꽃이 피어도 촬영 올 사람이 없지 싶다. 나는 뒤집힌 흙들을 대충 덮어놓으면서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았다. 벚꽃은 아직 싹도 보이지 않아 낙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할매, 잘 먹었습니다]
[입맛이 돌지?]
[네. 무슨 나물인가요?]
[땅두릅이랑 잡 것들이야. 이것저것]

  역시 기대했던 대로 올 해의 첫 나물무침은 입 안에서 향긋함을 톡톡 내뿜어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배도 부르고 잠도 오지 않아 할매에게 그릇을 돌려준 뒤 마당을 세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도 수마가 찾아오지 않는다. 요즘 머릿속이 산란하여 그런 것임을 알기에 더 열심히 돌아본다.

[퐁퐁...퐁퐁]

  몇 바퀴 쯤 돌았는지 달이 환해진 한밤중이 되자 수로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느낌이라 다가가 고개를 숙여 어두운 물속을 바라보았다. 내 눈 앞에 물 위를 떠가는 목련 꽃잎이 보였다. 둥실둥실 떠내려간다. 수로의 물길을 따라가는데 목련 꽃 잎 안에는 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 물에서 퐁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방울씩 거품이 올라온다. 그 재미있는 목련 꽃잎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보는데, 새로운 목련 꽃잎이 또 나타났다. 그렇게 1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계속 떠내려 온다. 마을 앞에 있는 목련 나무는 오늘 아침에 보았을 때 이제 겨우 순이 올라오는 정도였다. 그 나무의 꽃잎은 절대 아니다. 나는 수로를 따라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 마을의 수로는 땅 위로 보이다 덮이다 하여 따라가기가 만만하지는 않지만 결국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안다. 비가 심하게 올 때면 수로의 물 길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 수로의 물은 학마을 개울에서 시작하여 저수지를 지나 상석리 개울로 이어진다. 목련 꽃잎이 땅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아도 먼저 저수지에 가서 기다리면 그 곳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중간에 푹 젖어 사라지지만 않으면..

  저수지는 고고한 달빛에 취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중이다. 수영 금지 표지판도 이 정도의 달빛에는 잘 보이지 않아 정취를 깨지 않는다. 나는 수로가 이어지는 지점 근처까지 내려가 쪼그리고 앉았다. 뛰어왔기 때문에 좀 더 있어야 처음 봤던 목련 꽃잎이 나타나리라 추측한다.

[하나, 둘, 셋, 넷..]

  기다리기 심심하여 카운트다운을 하듯이 숫자를 센다. 25쯤 되었을 때 퐁퐁 소리를 내는 목련 꽃잎이 짠하고 나타났다. 반가워서 잡아 보려고 하니 마치 내 손을 피하듯이 옆으로 틀어 다른 방향으로 간다. 저수지를 가로질러 반대쪽에 도달하는 게 달빛에 보였다. 즉시 일어나 그리로 돌아갔다.

[이제 왔나?]
[이리 앉으시게]

  산신들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우리 집 수제 막걸리를 말없이 먹고 가신 분들인데 오늘은 달빛 놀이라도 나오셨는지 바닥에는 천을 깔아놓고 여러 가지 음식을 앞에 두고 둥글게 앉아 있다. 그들은 허리를 바짝 세우고 있지만 그래도 내 상체의 반도 안 된다. 난장이랑 거인 같은 기분. 그래도 초대를 받았는데 거절하기도 뭣하여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 목련 꽃잎에 이어 나머지들이 계속 산신들의 근처에 당도하는 게 보였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산신이 하나씩 건져내어 손에 쥐어준다. 10여 명이 모두 한 개씩 들자 건배를 제의했다. 나도 눈치껏 달빛에 높이 들어 보인 후 입 안에 퐁퐁 소리를 내는 물을 털어 넣었다.

[아...]
[어때?]

  눈물이 어리는 기분이다. 목울대를 퉁기는 샤한 느낌이 술인데도 술 같지 않고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다.

[이 술의 이름은 망우주라네] 

[망우주...무슨 뜻인가요?]
[잊을 망, 근심할 우, 술 주. 마음의 근심을 잊게 해주는 술]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술이다. 정말 그런 술이 있기를 바랬는데 진짜로 있다. 맛도 좋은 게 천상의 술이다. 산신은 허리춤에서 파란 색의 병을 꺼내 퐁퐁 소리가 나는 술을 더 따라주었다.

[벚꽃도 만발하고 술도 맛있으니 이 아니 좋은가]

  산신 한 분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지 바람이 불어오면서 벚꽃이 쏟아져 내린다. 달빛에 물든 벚꽃잎은 내 머리에도 어깨에도, 그들의 등에도 가득 자리 잡았다. 그리고도 계속 비처럼 내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수지의 벚꽃 나무들이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꽃을 달고 있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가지와 벚꽃을 바라보았다. 올 해 꼭 보고야 말리라고 다짐한 벚꽃의 향연을 이렇게 접하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근심과 걱정이 저만치 가버렸다. 과연 망우주에 망우화였다.

[이봐, 권선생~예서 자면 입 돌아가]

  황주 할매가 세게 흔드셔서 속이 느글거리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논을 보러 나온 길에 저수지 앞 풀밭에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셨다고 하신다. 옆으로 누워서 잤는지 오른쪽 어깨부터 다리까지 저리고 쑤셔서 쩔쩔 매며 일어섰다.

[술이 다가 아니잖아. 몸 상하겠네]

  절룩이며 집으로 들어가는데 밭에서 청산 할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망우주 덕인지 속은 쓰려도 머릿속의 근심과 걱정은 이제 좀 덜하다. 

  그날은 끼니도 거르고 하루 종일 잤다. 다음 날 울산댁네 장 닭의 시끄러운 아침 인사에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안개가 낀 동네를 걸어 다녔다. 마을 앞 목련 나무와 저수지의 벚꽃 나무에게도 다녀왔다. 물론 꽃잎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의 절경은 마치 꿈같지만, 눈 감으면 생생히 기억나니 꿈이 아닌 꿈이다. 아름다운 한 순간이었다. 이제 벚꽃을 기다리는 일은 안 해도 될 듯하다. 그리고 산신이 선물로 주었는지 책상 위에는 그물무늬의 병이 나비 연적과 개구리 벼루 옆에 서 있다. 왠지 거기에 물을 넣어두면 퐁퐁 소리가 나는 망우주가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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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바다 2009-09-2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햇살이 따가운 한낯입니다..점심때도지나고 한숨 잤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어릴적기억으론 그곳의 겨울은 차가운 바람..정말 바람이 차고 매서웠는데..봄이면 벗꽃은 기억이 없고 온통 하얀 사과꽃 천지여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가며 '과수원길'을 무수히 부르곤 햇는데..참..며칠전 부석사사과라며 시장에서 트럭을 갖다놓고 팔길레 반가운 맘에 얼른 두봉지나 샀습니다..작가님생각도나고해서..

최현진 2009-09-2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ㅎㅎ 조금 있으면 껍질이 아주 얇고 그냥 먹어도 되는 뜬 바윗골 사과가 출하될거에요. 작년엔 백화점에 납품 되기엔 작거나 제멋대로인 애들만 모은 걸 샀는데도 너무 좋아서 주변에 나누어주었어요. 언젠가 우주바다님께 그런 사과드리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사신거 맛있게 드세요.